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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l 04. 2024

일주일을 부탁해^^

은이의 충실한 밥

봄은 무섭게 자라났다.

추위로 꽁꽁 얼어있던 생명들에게 환한 빛과 열의 세례가 쏟아지면서,

초목은 빠른 속도로 세상을 덮어나갔다.

매일 오전,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자를 러쓴 은이가 풀과 나무들을 보러 집을 나설  때마다,

키와 이파리들이 쑥쑥 자라 있어 깜짝깜짝 놀란.

마치 팔랑팔랑 달려가는 아이처럼,

봄날의 매 순간,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크기와 두께를 키우며 무성해지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색은 빠르게 짙어다.


은이는 그 속도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그림 그리기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일매일 사진을 찍거나 메모하거나 간단하게 스케치하거나,

시시각각, 달라져가는 이파리의 색상 물감으로 재현해 보거나.

그렇게 만든 자료들을 시간과 장소 별로,

지도를 그리고 파일정리하는 작업으로 오후를 보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을 그리려면 먼저 그들을 관찰하고 공부하여,

풀과 나무들의 생명 활동, 살아가는 환경을 이해해야 하는 거였다.

호흡으로 꾸준하게 열의를 갖고 진행해야 하는 멀고 먼 작업에 뭣 모르고 들어서버렸네.

서두르말자, 고 은이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초록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월, 화, 수, 목요일을 보내고 나면 몹시 피로해졌고.

주말에는 이것저것 밖에서 해야 할 일, 만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핀 봄날의 토요일.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왁자지껄 어울렸더니,

일요일에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은이로서는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만 먹으면서 빈둥빈둥거려,

몸이 회복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말이지.


은이가 하는 작업은 바쁘거나 고되지는 않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몰두하여 진심을 쏟아야 하는 일이고.

살림은, 혼자 사는 1인 가구로서 힘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몸만 움직여서는 이루어지 않는다.

의욕적으로 집을 치우고 환경을 정돈하고 음식을 만들려면,

적어도 은이로서는, 

휴식으로 충전한 신체와

혼자 조용히 보낸 시간으로 마음이 평온해져야 집안일에 전력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건 많아 온갖 식재료를 다 사서 냉장고는 꽉 차있지만.

제대로 일주일의 밥상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한 일주일 동안,

은이는 밥상에 먼저 김치나 장아찌 종류를 꺼내놓고.

그때그때 날고기를 팬에 구어 소금 찍어 먹거나.

냉동실에서 손질된 생선을 꺼내 기름 바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오븐에 거나.

레트로트 삼계탕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반건조 오징어에 칼집을 내어 오븐에서 익혀 참기름을 바르거나.

메밀국수를 삶아 들기름과 잘게 썬 대파, 간장, 깨와 김가루에 비벼먹거나.

또는 명란젓과 날계란. 잘게 자른 대파를 찬밥에 얹어 전자레인지에 익힌 뒤 참기름과 간장에 비벼먹거나- 하는 지극히  간단한 조리를 했고.

 과정조차 생략해서 수한 황태채를 질겅질겅 씹거나.

손질하지 않은 멸치를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는 한 마리 한 마리 머리와 내장을 떼어내며 고추장에 콕콕 찍어먹었다.

 할 기운이 없어서 누룽지를 끓여서는 낙지젓을 반찬으로 먹기도 지.

약밤이나 양갱, 떡이나 과일 같은 간식으로 배가 빵빵해지기도 했다.



쉬고 푹 자서 개운하게 일어난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은이는, 창문을 활짝 열어 부엌으로 나간.

컵에 볶은 귀리를 넣어 두유를 붓고.

볼에는 삶은 병아리콩과 삶은 계란을 으깨서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서,

사과와 함께 들여와 밥상을 차렸다.

창문을 닫고 음악을 틀어 느긋하게 한 숟가락씩 떠먹고는.

베란다에 앉아서 텅 빈 골목을 쳐다보며 깜깜한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마시고.

유튜브를 보면서 느릿느릿 포도까지 반 송이 뜯어먹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을 싹 치운 다음에.

틈틈이 작성해 둔 메모를 보면서 조리도구와 식재료를 꺼내어 다음 일주일 먹을 밥상을 준비하기 시작한.

부엌이 좁은 데다 조리도구도 부족하니,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하려면 순서를 잘 짜야한다.

먼저 리도구를 헹궈놓고.

음식마다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양파나 고추, 대파와 마늘을 썰어둔 뒤,

다시 어질러진 부엌치워 말끔해진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조리 시작!


먼저 메인요리.

찜요리를 하자.

두 번 해 먹어야지.

한 번은 새우랑 부추, 양파, 마늘, 버섯을 쪄서 양념장에 찍어먹고.

한 번은 훈제오리와 냉동실의 믹스채소를 쪄서 겨자소스에 찍어먹어야겠다.

찜요리는 조리과정이 단순하고 소를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재료 다듬느라 손은 좀 가지만요.


불고기, 

불고기는 그냥 반찬으로 먹어도 좋지만 쓰임새도 많다.

한 번은 갓 지어낸 뜨거운 밥에 김치랑 해서 반찬으로 먹고.

다음에는 냄비에 밥을 덜어 버섯이랑 채소가 든 불고기를 얹어,

뜨끈하게 데운 덮밥으로 먹고- 총각김치랑 잘 어울려요.

 팬에 양파, 쪽파, 버섯을 볶다가 계란을 넣고 불고기를 더하면,

은이가 좋아하는 담백한 피타브레드 빵의 속을 채우거나 토르티야에 싸 먹으면 맛있다.

불고기가 남으면 무 장아찌랑 계란, 미나리를 더해 김밥을 싸야지.

오늘은 간장에, 설탕, 다진 마늘에 매실액, 청주를 넣은 1차  양념장을 만들어두었다가,

먹을 때 양념장에 참기름이랑 다진 대파를 추가해서 소고기에 버무릴 거야.


은이는 뭉근하게 끓여낸 미역국을 밥 없이 미역이랑 국물만도 잘 먹는다.

낮에는 이 쨍쨍하지만 아직은 서늘한 아침에는,

뜨끈한 미역국 한 사발 떠먹으 속이 편하고  든든하다.

멸치 육수만으로, 소고기나 해산물 없이,  냄비 가득 미역국을 끓인다.


된장찌개는 재료만 손질해 두자.

소고기 사태는 깍둑썰기를 해서 핏물 빼어 살짝 데쳐두고.

감자, 애호박, 매운 고추, 양파, 두부 같은 채소는 손질해서 먹기 좋게 썬다.

된장찌개는 굵은소금을 뿌려 바싹 구운 고등어와 참 어울린다네.



아, 이쯤에서 피로감과 허기가 확 밀려든다.

중간중간 치우면서 했지만 그럼에도 수북한 설거지냐 밥이냐,

뭘 먼저 해낼지 잠갈등했지만.

배가 든든해야 일도 잘하지 않겠어요?

작은 냄비에 찬밥을 담고 찰랑찰랑 미역국을 덜어 보글보글 끓여서 잘 익은 배추김치랑 먹어주고요.

녹차 한잔 우려 마시고.

부엌을 싹 치운 뒤에 후반전 시작합니다.

밑반찬을 즐기는 입맛은 아니지만 있으면 요긴하다.

피곤할 때 밑반찬을 덜어 밥이랑 먹으면 되거든.

잘게 썬 매운 고추를 듬뿍 넣어 멸치볶음 만들고요.

국물 자작하게 들기름과 된장으로 시래기를 볶는다.

밥에 얹어 쓱쓱 비벼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매운 비빔국수를 먹을 요량으로 고추장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맵싸한 양념장도 한 통 만들어두고요.

오이지 두 개는 얇게 썬다.

짭짤한 오이지를  양념에 무치지 않고 피클처럼 먹는 걸 좋아하거든.

감자와 고구마도 깨끗이 씻어두고.

사과와 오렌지도 이틀 치 껍질을 벗겨 한 입 크기로 잘라 용기에 담고.

찜요리와 함께 먹을 양념장과 소스를 만들고.

간장으로 오리엔탈 드레싱을 만들면서 샐러드 용 미역을 물에 불린 뒤, 펄펄 끓는 물 한 주전자 흘려주고.

역시 샐러드에 넣을 채소와 대저토마토도 손질해 두었다.

마지막으로 병아리콩과 땅콩을 각각 조금씩 삶아서 찬물에 깨끗이 씻어 통에 담고요.

계란도 다섯  삶았다.

끝냈다, 만세!


무말랭이 무침, 가자미조림, 황태채 무침도 계획에 있었지만,

지금까지 만든 걸로도 반찬이 충분해 보이니 다음으로 미루자.

혹시 반찬이 모자라면 김치랑 참치를 참기름에 달달 볶아야지.

냉장고에 나란히 정렬한 크고 작은 밀폐용기들을 보니 뿌듯하다.

다음 일주일은 쉽게 지내겠어.



다루는 식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알아야 무엇과 무엇이 어울리는지 요리를 상상해 낼 수 있고.

조리도구의 특성을 잘 파악해야 조리방법에 적합한 도구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

대상을 이해하고,

물감과 도구를 잘 알아야 자유자재하게 상상 속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리니.

은이는 그림을 그리거나 요리를 하거나,

먼저 대상과 재료의 속성을 잘 알아내고,

깊은 관심며,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요리와 그림 그리기의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저 치우고 얼른 누워야겠어.

수고했다, 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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