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무섭게 자라났다.
추위로 꽁꽁 얼어있던 생명들에게 환한 빛과 열의 세례가 쏟아지면서,
바싹 말려있던 초목에 생기가 돌더니.
곧 빠른 속도로 겨울의 황량함을 화사하게 덮어나갔다.
매일 오전,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자를 눌러쓴 은이가 풀과 나무들을 보러 집을 나서면.
눈에 보이는 모든 식물들의 키와 이파리들이 쑥쑥 자라 있어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마치 팔랑팔랑 달려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아이처럼.
봄날의 매 순간,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크기와 두께를 키우며 무성해지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색은 빠르게 짙어갔다.
은이는 그 속도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이들의 성장을 그려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일매일 사진을 찍거나 간단하게 기록하거나 형태를 스케치하거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시시각각, 달라져가는 이파리의 색상을 물감으로 재현해 보거나,
잊지 않도록 이들의 오늘을 최대한 묘사해 두는 것으로.
그렇게 매일매일 꼼꼼하게 만든 자료들을 시간과 장소 별로,
지도를 그리고 파일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오후를 보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을 그리려면 먼저 그들을 관찰하고 공부하여,
풀과 나무들의 생명 활동, 살아가는 환경을 이해해야 하는 거였다.
긴 호흡으로 꾸준하게 열의를 갖고 진행해야 하는.
멀고 먼 지난한 작업에 뭣도 모르고 발을 들였네.
서두르지 말자,
길게 보자, 고 은이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렇게 초록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월, 화, 수, 목요일을 보내면서,
동시에 깔끔하게 생활을 꾸려가고
식사도 만족스럽게 해내면서 은이는 마음이 뿌듯한 마음이 된다.
스스로 갈 길을 선택하고,
작업 대상을 찾아내어,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로,
나름 충실하게 해 나가는 자신에게 자부심이랄까, 뭐 그런 기분.
그렇게 작업에도, 생활에도 성실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고 부엌을 싹 치우고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딸깍, 천장의 전등을 끄고 침대 옆 동그란 스탠드를 켜고 잠자리에 쏙 들어가면.
아, 오늘 하루도 의미 있는 하루였어, 충만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네 날을 보내고 나면 몸이 피곤해지지만
주말에는 또 이것저것 밖에서 해야 할 일, 만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네.
정해진 코스였던 학교는 졸업하고,
해야 할까. 말까 싶은 결혼은 아직 하지 않은 20대 처자들은,
갈팡질팡 꿈과 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 번민도 많고
이리저리 헤매느라 잡념도 많은 시기이니.
친구들은 항상 서로를 찾으면서 웃거나 침울하거나,
주고받을 이야기가 많았다.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난 따스한 토요일.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왁자지껄 어울렸더니,
일요일에는 도무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네.
은이로서는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밥만 먹으면서 빈둥빈둥거려야,
다음 발자국을 뗄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되고 정신이 맑아지는데 말이지.
은이가 하는 작업은 바쁘거나 고되지는 않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몰두하여 진심을 쏟아야 하는 일이고.
살림은, 혼자 사는 1인 가구로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심하게 몸만 움직여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욕적으로 집을 치우고 살림을 정돈하고 음식을 만들려면,
적어도 은이로서는,
휴식으로 충전해 가뿐해진 상태의 신체와
혼자 조용히 보낸 시간으로 평온한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집안일에 전력을 쏟을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건 많아서 오며 가며 갖가지 식재료를 다 사들여 냉장고는 꽉 차있었지만.
제대로 일주일의 밥상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한 월요일부터,
은이는 밥상에 주섬주섬 김치나 장아찌 종류를 꺼내놓고.
그때그때 날고기를 팬에 구어 소금을 찍어 먹거나.
냉동실에서 손질된 생선을 꺼내 기름 바르고 굵은소금을 살짝 뿌려 오븐에 굽거나.
레트로트 삼계탕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반건조 오징어에 칼집을 내어 오븐에서 익혀 참기름을 바르거나.
또는 메밀국수를 삶아 들기름과 잘게 썬 대파, 간장, 참깨와 김가루에 비벼서 계란프라이와 함께 먹거나.
또는 명란젓과 날계란. 잘게 자른 쪽파를 찬밥에 얹어 전자레인지에 익힌 뒤 참기름과 간장에 비벼먹거나- 하는 지극히 간단한 조리를 했고.
종종 그 간단한 조리 과정조차 생략해서 구수한 황태채를 질겅질겅 씹거나.
손질하지 않은 멸치를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는 한 마리 한 마리 머리와 내장을 떼어내며 고추장에 콕콕 찍어먹었다.
밥 할 기운이 없어서 누룽지를 푹 끓여서는 계란 프라이에 낙지젓을 반찬으로 먹기도 했지.
약밤이나 양갱, 떡이나 과일 같은 간식으로만 배가 빵빵해지기도 했다.
뭘 먹든 많이 먹으면 배는 부른다.
하지만 뭔가 모자라지.
자려고 누우면 허기진 느낌이 남는다.
잘 쉬고 푹 자서 개운하게 일어난 4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은이는,
창문을 활짝 열고 자고 일어난 침대를 정리한 뒤 부엌으로 나간다.
컵에 볶은 귀리를 덜어 두유를 붓고.
볼에 삶은 병아리콩과 삶은 계란을 넣고 숟가락으로 대충 으깨어서는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서,
찐 고구마 하나, 사과 하나를 더해 아침밥상을 차린다.
창문을 닫고 음악을 틀어놓고는
느긋하게 앉아 음식을 한 숟가락씩 떠먹고,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물에 담가둔 뒤에.
물을 끓여 커피를 내려서는 베란다로 나간다.
텅 빈 골목을 쳐다보며 깜깜한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유튜브를 보면서 포도까지 반 송이 뜯어먹은 뒤 길고 긴 휴일의 아침식사를 마무리했지.
자, 기분 좋게 먹었으니 이제는 일을 해야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을 싹 치운 다음에,
틈틈이 작성해 둔 메모를 보면서 조리도구와 식재료를 꺼내어 다음 일주일 먹을 밥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부엌이 좁은 데다 조리도구도 부족하니,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음식을 하려면 순서를 잘 짜야한다.
먼저 조리도구를 헹궈놓고.
음식마다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양파, 고추, 대파와 마늘을 용도에 맞게 썰어둔 뒤,
다시 어질러진 부엌을 치워 말끔해진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조리 시작!
먼저 메인요리.
찜요리를 해보자.
두 번 해 먹어야지.
한 번은 새우랑 얇게 썬 소고기, 쪽파, 양파, 마늘, 버섯을 쪄서 양념장에 찍어먹고.
한 번은 훈제오리와 버섯, 부추에, 냉동실의 믹스채소를 쪄서 겨자소스에 찍어먹어야겠다.
찜요리는 조리과정이 단순하고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재료 다듬느라 손은 좀 가지만요.
한 번에 먹을 만큼씩 다듬은 재료를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로 직행.
다음은 소 불고기다.
불고기는 그냥 반찬으로 먹어도 좋지만 만들어 두면 이모저모 쓰임새도 많다.
처음에는 갓 지어낸 뜨거운 밥에 배추김치랑 해서 반찬으로 먹고.
다음에는 냄비에 밥을 덜어 버섯이랑 채소를 더 넣어 볶은 불고기를 얹어,
뜨끈하게 데운 덮밥으로 먹고- 총각김치랑 잘 어울려요.
또 팬에 양파, 쪽파, 버섯을 볶다가 계란을 넣어 익히고, 마지막에 불고기를 더하면,
은이가 좋아하는 담백한 피타브레드 빵의 속을 채우거나 토르티야에 싸 먹어도 맛있다.
불고기가 남으면 무 장아찌랑 계란, 양념한 미나리를 더해 김밥을 싸야지.
오늘은 간장에, 설탕, 다진 마늘에 매실액, 청주를 넣은 1차 양념장을 만들어두었다가,
먹을 때 양념장에 참기름이랑 다진 대파를 추가해서 소고기에 버무릴 거야.
그러니 불고기 준비도 끝.
이번에는 오징어 조림을 만들자.
이미 두어 시간 물에 불려둔 마른오징어를 새끼손가락 길이로 가늘게 잘라놓고요.
꽈리고추를 듬뿍 넣어 양념장에 한참 졸인다.
살짝 매콤한 맛을 느끼면서 질겅질겅 씹는 짭짤한 오징어조림은 언제나 환영받는 밥도독이죠.
은이는 뭉근하게 끓여낸 미역국을 밥 없이 미역이랑 국물만도 잘 먹는다.
낮에는 볕이 쨍쨍하지만 아직은 서늘한 아침에,
뜨끈한 미역국 한 사발 떠먹으면 속이 편하고 든든하거든.
멸치 육수만으로, 소고기나 해산물 없이, 큰 냄비 한가득 미역국을 끓여둔다.
된장찌개는 이틀쯤 뒤에 먹을 거니 오늘은 재료만 손질해 두자.
소고기 사태는 깍둑썰기해서 핏물 빼어 살짝 데치고.
감자, 애호박, 매운 고추, 양파 같은 채소는 손질해서 먹기 좋게 썬다.
냉동실에 바지락이 있으니,
두부와 바지락은 찌개 끓일 때 손질해서 넣어야겠어.
된장찌개는 굵은소금을 뿌려 바싹 구운 고등어 또는 소금에 절인 고등어자반과 잘 어울린다네.
우리 밥상의 스테디셀러 고등어.
이쯤에서 피로감과 허기가 확 밀려든다.
중간중간 치우면서 했지만 그럼에도 수북이 쌓인 설거지냐 밥이냐,
뭘 먼저 해낼지 잠시 갈등했지만.
배가 든든해야 일도 잘하지 않겠어요?
작은 냄비에 찬밥을 담고 찰랑찰랑 미역국을 덜어 보글보글 끓여서,
금방 만든 오징어 조림에 잘 익은 배추김치랑 먹어주고요.
녹차 한잔 우려 마시고.
오렌지 하나 까먹고는.
부엌을 싹 치운 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후반전을 시작합니다.
밑반찬으로만 차리는 밥상을 즐기지는 않지만,
냉장고에 밑반찬 몇 가지를 갖추면 밥상 차리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요리하기 피곤할 때 장아찌와 밑반찬 몇 가지면 금세 밥상이 차려지거든.
잘게 썬 매운 고추를 잔뜩 넣어 멸치볶음을 만들고요.
국물 자작하게 들기름과 된장에 버무린 시래기도 볶는다.
밥에 얹어 쓱쓱 비벼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매운 비빔국수를 먹을 요량으로 고추장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맵싸하고 새콤달콤한 양념장을 한 통 만들어두고요.
오이지 두 개는 얇게 썬다.
짭짤한 오이지를 양념에 무치지 않고 피클처럼 먹는 걸 좋아하거든.
쪄먹거나 구울 감자와 고구마도 깨끗이 씻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두고.
병아리콩과 땅콩을 각각 조금씩 삶아서 찬물에 깨끗이 씻어 통에 담았고요.
계란도 다섯 알 삶았다.
찜요리와 함께 먹을 양념장과 소스를 만들고.
간장으로 오리엔탈 드레싱을 만들면서 샐러드 용 미역을 물에 불린 뒤, 펄펄 끓는 물 한 주전자 흘려주고요.
역시 샐러드에 넣을 당근, 파프리카와 대저토마토도 손질한다.
마지막으로 사과와 오렌지도 이틀 치쯤, 껍질을 벗겨 한 입 크기로 잘라 용기에 담는다.
다 끝났다, 만세!
무말랭이 무침, 가자미조림, 황태채 무침도 계획에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만든 걸로도 일주일 반찬은 충분해 보이니 다음에 해야겠다.
혹시 반찬이 모자라게 되면 배추김치를 잘게 썰어 통조림 참치랑 참기름에 달달 볶아야겠군.
하루 종일 부엌에서 만들어 낸 냉장고 속에 나란히 정렬한 크고 작은 밀폐용기들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다.
다음 일주일 밥상은 풍성하겠어.
다루는 식재료 하나하나의 맛을 알아야 무엇과 무엇이 어울리는지 요리를 상상해 낼 수 있고.
조리도구의 특성을 잘 파악해야 조리방법에 적합한 도구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
대상을 이해하고,
물감과 붓, 종이와 캔버스 같은 각각의 도구를 잘 알아야 자유자재하게 상상 속의 형태 또는 눈앞의 형상을 시각으로 구현하리니.
은이는 그림을 그리거나 요리를 하거나,
먼저 대상과 재료의 속성을 잘 알아내고,
깊은 관심을 두며,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요리와 그림 그리기의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의 하나하나를 잘 알게 되면 인생도 수월해질까?
부엌을 마저 치우고 얼른 씻고 누워야지.
오늘도 수고했다, 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