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없이 조부모님 품에서 자라난 은이는,
할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까지 하늘나라에 보내드리고 학교를 졸업합니다.
혼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어떤 명함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 마음먹은 은이.
그림을 그리려는 은이에게 그림은
생활을 함께하는 벗이고,
몰두해야 하는 일이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는 동시에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은이의 작고 예쁜 집>에서,
은이가 망망대해를 헤쳐나갈 인생길의 터전이 되어줄
조각배 같은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림 작업을 시작하고,
집을 치우고,
충실하게 밥을 해 먹으면서.
차곡차곡 일상을 채워가는 은이의 날들을 따라갑니다.
봄.
밝은 햇살이 대기를 따뜻하게 데워주면서 생명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침에 현관을 나서면 건물들 그늘 틈새에 화사한 햇살이 좁게 내리쬐는데,
땅을 덮은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불규칙하게 금이 간,
실 같이 가는 틈에 작은 떡잎이 보일락 말락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곧 풀은 줄기를 키우고 이파리를 펼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은이는 아주 미미한 그 흙에 생명을 내리고 자라나는 가느다란 풀 한 포기가 어찌나 대견한지,
집을 나설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을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제발 아무에게도 짓밟히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아서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는 마침내 누렇게 소멸해 가는-
자연스러운 생명체의 일생을 누리기를 기원했다.
모든 풀과 나무들이 그랬다.
비록 뿌리를 내린 곳은 싱그러운 숲이 아닌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가생이 또는 떠밀려온 쓰레기가 걸려버린 개천 한구석이더라도,
찬란한 봄 햇살 아래서 도시의 생명은 푸르른 몸을 쑥쑥 키워냈다.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졌다.
인간 사회는 결코 아름답지 않아서 거짓과 폭력과 탐욕이,
부끄럼도 모른 채 활개 치지만.
자연은 인간사의 비루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푸른 생명들로 어지러운 세상을 덮어나갔다.
세상이 환해졌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이곳저곳 도시의 풀과 나무들을 찾아다니면서 은이는 마음이 벅차지는 따스한 위안을 받는다.
지금은 사악한 어리석음이 광풍처럼 날뛰지만
그럼에도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들은 풀잎처럼 꿋꿋이 자라고 있으니.
그래,
희망을 걸어보자.
하루 또 하루.
공들인 밥상을 차리고 먹으면서 하늘하늘한 풀잎처럼 나 자신도 키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