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해"라고 후배가 비명을 질렀다.
집이 좁아도 너무 좁아서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집에 들어서면 훅, 숨이 막힌다는 거다.
졸업하면서 다행히 취직이 된 후배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립은 했지만
침대와 싱크대가 거의 나란히 있는 원룸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시간만 나면 음식이건 소품이건, 조물조물 만들기 좋아하는 후배는 곧 좁은 집에 불만이 생겼다.
"날도 좋은데 도시락 싸들고 밖으로 놀러 가고 싶어요."
응, 그건 해줄 수 있지.
친구들 사이에서 '집밥 트리오'라 불리는 은이와 후배와 다른 동기 하나는,
"돈 내고 맛없는 밥 먹으면 화 나!"와,
"음식을 왜 남겨?"가 강령이고,
부칙으로 "술 마실 돈이면 고기를 더 먹지!"라는 집밥 마니아들이다.
밥은 집에서!, 만이 아니라 도시락 싸들고 학교로, 야외로 행차하기도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도시락 싸서 야외로 놀러 가자, 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니.
어디서, 언제, 무얼 먹을지부터,
음식을 어떻게 분담할지.
왈가왈부 논의를 벌인 끝에
토요일 아침, 한강공원에서 모이기로 결정했다.
며칠 전, 구워 먹고 남은 항정살을 고추장 양념으로 볶았는데 식감이 쫄깃하니 맛있어서,
손이 근질근질, 누구를 먹여볼까, 하던 차라.
"항정살로 만든 제육볶음은 어때?" 하는 은이 제안에,
다들 "더없이 황송합죠" 손뼉을 치면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는 밥이랑 어머니 표 열무김치에 과일까지 책임진다 하고.
후배는 "제가 부침개를 잘해요. 인스턴트 재료 사서 기름에 지질 뿐이지만요."
김치전과 감자전에 더해 두툼한 계란말이까지 해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은이는 전날 밤 손가락 굵기로 도톰하게 자른 항정살을 고추장 양념에 재워두고.
초무침할 미역은 물에 불려서 건져놓고,
곁들여먹을 채소도 썰어서 용기에 싸두었다.
당일 이른 아침, 목욕탕과 부엌을 오가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고기를 볶고.
화장품을 바르다 부엌으로 가서
불린 미역에 양파와 오이를 더해 새콤하게 무치고,
쌈장에 찍어먹도록 길쭉하게 썰어둔 당근과 오이를 통에 담았으며.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는 동안 보리차를 펄펄 끓여서.
바자회 때 썼던 식판까지 배낭에 넣어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선다.
버스 타고 한강으로 가는 중에 톡이 울리네.
집밥 호소인 하나가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란다.
카페에서 아아 사줄게, 제발 껴줘 잉.
와, 어서 와.
너 하나쯤 먹일 분량은 되거든.
그래서 드레스코드라도 맞춘 듯 먹을 것이 든 배낭을 둘러메고,
후디에 조거팬츠 입고 모자를 눌러쓴 네 처자가,
5월 어느 아침, 한강에서 도시락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봄 날씨는 예측불가라지만 이번 봄은 특히 기온이 들쭉날쭉해서 일일이 바깥기온을 살피고 입을 옷을 골라야 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미세먼지는 쫌 있지만요.)
이맘때는 아직 녹음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시기라서
풀과 이파리들이 아이들 손처럼 연하고 부드럽다.
도도하게 흐르는 파란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그 사이를 짧은 바지 차림으로 달리기 하는 사람들,
헬맷에 몸에 붙는 옷을 갖춰 입은 자전거 행렬이 울끈불끈 바퀴를 굴리며 슝슝 지나간다.
앉을 장소를 찾던 넷은 수풀에서는 벌레가 나올지도 몰라, 무서워, 하면서
아침 볕이 짱짱하게 내리쬐는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폈다.
식판에 촥촥 밥을 덜고 제육볶음을 덜고 열무김치도 덜어서,
중간중간 김치전, 감자전을 곁들이며 냠냠 짭짭,
맛있는 밥 앞에서 입은 먹으라고 있을 뿐이라,
다들 말없이 밥만 먹고요.
배부르다면서도 그릇이 빌 때까지 수저 움직이는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으며,
후식 배는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지 과일도, 호소인이 들고 온 과자도 금세 빈통으로 만들어 버렸다.
꺼억, 고상하지는 못하지만 솔직은 한 트림을 시원하게 내뱉고요.
따뜻한 보리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싹싹 비운 도시락 통을 배낭에 챙겨 넣고,
돗자리를 걷으면서 쓰레기도 싹 치우고.
이제 좀 걸어볼까?
많이 먹었으니 그만큼 움직여야 해,
넷이 합창을 하네.
걸으면서 친구가 말한다.
하루하루 뻔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이게 맞나, 의아해지면서.
나는 그냥 생계비에 목을 맨 생활인의 길에서 평생 못 벗어나겠구나, 싶어 슬퍼지더라.
그래도 내가 찾으려고만 하면 오늘처럼 꽤 괜찮다, 하는 순간도 있는데.
고단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가끔 찾아오는 기쁜 순간들에 행복해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도 있는데.
내가 꾸었던 꿈을 떠올리면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져.
어린 시절 꿈은 멀어지고 생활인으로 필요한 실용성에만 몰두하니까.
꿈이라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 다른 친구가 말한다.
꿈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우리가 꿈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목표가 사실은 사회 분위기에 따른 물질적인 부분이 상당히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봤어.
적어도 꿈이라면 어떤 순수한 상태여야 할 것 같은데,
과시적인 소비라든가 타인을 이겨내려는 경쟁심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어서 이게 과연 꿈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물질 위주인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입된 환상이 상당히 포함된 욕망이 아닐까, 싶기도 해.
그래.
은이는 걸으면서 혼자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로 우위를 점하는 것,
많은 소유와 소비로 호사 부리고자 하는 상태를 우리는 쉽게 꿈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보다
무엇이 되는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는가, 에 우리는 치중하거든.
이를테면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일상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나의 꿈으로 여기는데.
어떤 이들은 유명한 화가가 되어 돈 많이 버는 걸 꿈이라 하지.
'유명한'과 '돈 많이'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은 뒤로 밀려난다. 다른 작품을 표절하고, 붓을 다른 손에게 맡기고, 심사위원을 매수하고, 미디어에 돈을 뿌리고 정치질을 서슴지 않지.
다른 분야라고 다를까.
우리가 일컫는 꿈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고귀하고 소중한 이상적인 가치를 갈망하는 듯 여기지만.
그것에 더해 사실은 누구에게 과시하거나 누구를 이겨내려는 탐욕이 혼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현실 그 자체는 어쩌면 견딜 만한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지금 당장 기아와 전쟁에 시달리는 건 아니니까.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을 바라는 욕망은 자족의 마음가짐을 배우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지도 몰라.
하지만 더, 더, 더 많은 걸 갖고 싶다거나,
더, 더, 더 많은 권력을 누리겠다는 욕심은 세상과 삶을 전쟁터로 만들지.
사회적으로 절제되지 않은 욕심이 활개를 치고,
욕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은 해도 된다는 비양심, 비도덕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그런 짓을 해서 부귀영화를 누린 들, 떳떳하겠어?
음, 떳떳은 몰라도 의기양양 한 사람들은 적지 않지.
부끄럼이 없는 걸까?
부끄러움은 몰라도 꺼림칙한 건 아는 게 아닐까?
그래서 더 억지를 부리는 거겠지.
머릿속을 오가는 상념이야 어떻든
솔솔 부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이파리들은 참 예쁘기도 하구나.
너른 강폭을 도도히 흘러가는 파란 강물을 바라보려니 가슴이 뻥 뚫린다.
좋아, 정말 좋아.
아침부터 맛있게 먹은 든든한 밥으로 이미 세상이 밝아 보이는 데다
봄날의 풀과 물은 햇살에 빛을 뿜으니.
봄바람 날 불러내시고,
제육볶음 날 배부르게 하시니,
행복하고 행복하도다- 흥얼흥얼,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네.
쉬다 걷다,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걸었다.
날이 더워져 걷기에 지친 일행은 카페에 들어갔고 몸이 노곤하니 말할 기운이 없지만.
얼음 가득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정신이 들었는지 이구동성 오늘 정말 좋았다고,
걷다 보니 시끄럽던 마음이 평화로워져,
잡념이 사라지는 마술 같다, 고 다들 걷기를 예찬한다.
더워지기 전에 또 걷자고,
남산둘레길이 좋대,
인왕산 자락길도 걸을 만하다던데.
한성 도성길은 어때?
이러쿵저러쿵 들은풍월을 읊다가.
각자 검색해서 코스를 정하기로 약속한 뒤,
오늘부로 집밥 클럽은 당분간 걷기 모임으로 전환한다! 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카페를 나와 헤어질 때 은이가 후배를 붙들었다.
내가 쿠폰 준다는 데 홀랑 넘어가서 온갖 휴지 종류, 치약, 세제 같은 생활용품들을 너무 많이 샀어.
물건 박스가 화장실 통로를 막아서 몸을 돌려야 지나갈 수 있거든.
우리 집에 가서 너 쓸만한 거 좀 덜어가 줄래?
후배와 함께 집에 오는 길에 은이는 졸음이 쏟아져서,
뭐라 뭐라 하는 후배의 말이 귀를 스칠 뿐.
몇 번씩 걸음을 멈추면서 언덕 꼭대기, 집에 도착해,
다시 집까지 가려면 배가 고파질 후배에게 냉동실의 백설기 한쪽을 데워서 두유와 함께 차려주고.
후배가 간식을 먹는 동안 은이는 주섬주섬 생활용품들을 골고루 한 보따리 챙긴다.
이렇게나 많이요?
한동안 생필품 걱정이 없겠다며 후배는 고맙다 인사하고.
골목을 내려가는 후배를 손 흔들어 배웅한 은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속으로 쏙.
한숨 자고 일어나서 씻어야지.
아웅, 너무 졸려.
아, 그런데 참 보람찬 하루였다.
종아리는 뻐근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