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차리셨던 밥상
우리 부모님이 살아간 생활 방식은 회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
이제 현실에서 재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 사회가 우여곡절은 있었고 여전히 갈팡질팡 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약자를 대하는 시선과 제도가 무척 좋아졌다.
내가 어릴 때는 다들 살기 힘들어서 그랬는지 사회 전체가 참 거친 분위기였다.
인정은 있었다지만 제도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었고 배려는커녕 맘껏 짓밟았던 시절이었지.
초라한 거리를 헤매던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
누가 내 것을 가져갈까 서로 의심했고,
가난과 불안으로 신경이 곤두선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도 쉽게 폭력적인 언행을 터뜨리곤 했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있었다고 보통들 회상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언뜻언뜻 거칠고 험한 사회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일화들을 드물지 않게 기억하는 걸 보면,
지금이 더 풍족하고 자유로운 사회여서인지 사람들의 내면이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안정되었지 않나? 싶다.
(여전히 마음속은 전쟁터마냥 총알이 나르고 폭탄이 쏟아지는 지옥 같은 사람들이 잇긴 하다)
가혹한 군사독재 하에서 오로지 물질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로 서로 경쟁과 이기심을 극대화했으니.
약육강식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공존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절과 전쟁이라는 잔인한 시대에 닿을 것이다.
잔인한 시대를 거쳐 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슬픈 흔적이 남는다.
우리 어머니는 흥남 출신이시다.
해방 이듬해, 북한의 화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별다를 것 없었던 평범한 출근 뒤 행방이 묘연해지셨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소련군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이어서 정치 사건에 연관되어 어머니의 외숙과 고모부도 학살당하셨다.
손이 귀한 집안에, 권력에 대척진 형편이라 젊은 부인들이 직접 피투성이 시신들 더미에서 당신의 남편 시신을 수습해야 했었단다.
남이나 북이나 권력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걸림돌은 싸악 밀어버리는 잔인한 순서가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가장이 사라지고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우리 외할머니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병을 얻었는데 여중생 딸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어린 4대 독자는 키워야 했으니.
집을 비워두고 정치 바람이 덜하던 원산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조부모들이 각자의 집을 지키고 계시던 흥남으로 돌아갔는데,
날로 격해지는 폭격 때문에 어머니 가족은 양가 할머니들과 가까운 시골로 피신하셨고.
집을 지키신다고 혼자 흥남에 남아계시던 어머니의 외조부께서는 폭격으로 사망하시고 말았다.
미군이 올라오고 폭격이 더 심해지면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할 상황이 되었고,
행방이 묘연한 아들을 기다리시는 친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올까 싶어 집을 떠날 수 없다시고.
외할머니는 전쟁이 곧 끝날 테니 늙은 나는 집을 지키고 있겠다며 피난을 거부하셨다.
잠깐 이 폭격을 피하면 집에 돌아올 수 있으려니,
그렇게 보따리를 챙겨 집을 나선 젊은 어머니와 여고생 딸과 어린 남동생, 이 세 식구는 흥남 부두에서...
이 피난길이 바로 영영 고향을 떠나게 되는 1.4. 후퇴였고.
이후 모녀는 따로따로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타는 이산과, 눈물 나는 상봉과, 지독히 희박한 확률의 행운과 - 뭐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거제도와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머니는 다시 안전한 삶의 궤도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또래 여학생 40명과 함께 목선을 얻어 타고 묵호항을 지나 포항에 내리셨는데,
도착한 첫날 우연히, 남쪽으로 내려와 있는지도 몰랐던 친척과 마주쳤고.
며칠 뒤 다른 배를 타고 거제도에 도착해서 우리 어머니를 수소문한 외할머니가 포항으로 사람을 보내 어머니를 데려올 때까지 한 달 동안 어머니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그 집에 머물러 계셨고.
함께 도착한 다른 여학생들은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배에 오른 상황이어서 포항에 내려 잘 곳도, 끼니를 때울 방법도 없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우리 어머니가 드문드문 갖다 주는 약간의 먹을 것을 기다리다가,
나이 먹은 뱃사람들에게 시집가기도 했단다.
격렬한 시대의 흐름에 한 개인의 운명은 추풍낙엽이었다.
* 이모할머니
우리 외할머니는 훤한 외모에 조용한 살림꾼이셨는데,
외할머니의 유일한 자매인 이모할머니는 큰 키에 아주 흰 피부를 가진 활달한 성품이셨다.
우리 외할아버지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이모할머니는 울고 있는 언니를 대신해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미군 정보당국을 찾아다닐 만큼 매사에 적극적이셨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음대생 시절 너나없이 했던 파마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왔다가,
어머니와 이모에게 '애 버렸다'면서 밤새 머리털 쥐어뜯긴 사연으로 우리에게 이모할머니를 설명하시곤 했었다.
바로 어제 일인 듯, 어유 정말 너무했어, 하시면서.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서울에 자리 잡은 우리 외가와 달리,
이모할머니 부부는 전쟁이 끝나면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돌아가겠다며 속초로 가셨다.
그곳에서 늦둥이 외동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서울의 중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통일은 되지 않았고 사업이 잘 되었던 두 분은 그대로 속초에 정착하셨다.
내 어릴 때 이모할머니네는 우리 집에 해산물을 많이 보내주셨다.
그때 속초는 교과서에 나오는 큰 어항이어서 갖가지 해산물이 풍성했다.
얼음에 채우거나, 꾸득꾸득 말리거나, 굵은소금에 절인 복어, 명태, 도루묵, 가자미, 오징어들이 담긴 나무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차에서 내려졌다.
소금에 절인 복어 껍질은 소금기를 빼서 채소랑 갖은양념에 무치거나 튀겨서 잘 먹었다.
남들은 젓가락으로 찍어먹던 명란젓을 우리 집에서는 계란찜에 풍덩풍덩 넣거나 밥솥에 찌거나 팬에 구워서 덥석 덥석 베어 먹었다.
가자미식해를 아시는지.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면 친구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이게 뭬야' 법석을 떨었지.
도루묵은 또 얼마나 잘 먹었게.
지져먹고 쪄먹고 구워 먹고.
붉은색 알을 한 소쿠리 쪄서 부엌에 두면 집안의 여자들이 오가며 꽈드득 꽈드득 알 씹어대는 소리가 요란했었지.
어른이 되어 혼자 속초에 간 적이 있다.
집들 바로 앞으로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페인트 벗겨진 작은 배들이 물결에 부딪치는 부두의 냄새는 낯설었다.
낡고 오래된 마을을 지나면서 귀에 익은 동네 이름을 들었다.
이 부근 어딘가에 살고 계셨겠으니,
파란 바다에서 나온 생선들은 두 분의 손을 거쳐 바리바리 차에 실려 우리 집으로 떠났겠지.
슬픔이랄까, 죄송함이랄까,
아무것도 모르고 먹기만 했습니다-하는.
우리가 이모라 불렀던 이모할머니의 외동딸은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이모가 우리에게 알려준 70년대 청년 문화- 김현승의 시, 카프카, 헤세와 전혜린,
전원이니 돌체니 하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드라마 센터의 연극과 존 바에즈, 밥 딜런의 나지막한 노래들.
사복 입고 모자 쓰고 따라갔던 가무의 비엔나커피와 종로 반쥴의 통기타 가수.
함박 스테이크와 멕시칸 샐러드.
별이 총총한 밤에 옥상에서 기타 치며 부르던 '밤배'와 '연가' 같은 맑은 노래들.
한껏 소리 낮추어 침울하게 말해지던 이철과 유인태, 위수령, 유신 같은 단어들.
교사자격증은 있으나 정규 발령을 받지 못해 임시교사와 가정교사로 불안정한 20대를 보냈던 이모는,
가세가 기운 가운데 애지중지 키워졌던 어린 시절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막막한 현실에 무척 힘들어했다.
여리고 결이 고와 억척스럽지도 못하고 굳세지도 못했으며 힘든 내색도 하지 못했던.
늙은 부모에 대한 중압과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몹시 힘들어하더니.
결혼하고 1년도 안 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외동딸이 떠난 뒤 두 분은 가난과 병으로 굉장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외할머니 살아계실 때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남쪽에 있는 두 분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우리 외할머니는,
힘들었던 이승은 다 잊고 멀리멀리 날아가라고
두 분을 화장해서 바람 부는 바다로 훨훨 날려 보냈다.
홀가분하게, 아무 원망도 남기지 말고 그렇게,
무거운 삶은 버리고 훌훌 떠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