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와 진료가 반복되는 병원 행차로 봄을 보내고 있다.
그 틈틈이 서울의 옛날 동네들을 찾아다녔다.
명동에서 남산을 지나 중학교 시절 친구 집이 있었던 후암동 일대.
아버지가 성장하시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북촌 부근.
그리고 내가 태어난 수송동에서 종로까지.
한 구역을 싹 밀어내고 고층빌딩으로 재개발한 곳이 많은데.
그래도 중간중간 오래된 건물, 아주 좁은 골목, 좁은 집터, 큰 나무는 자리를 지켰으며.
길이라든지 지역 단위 같은 전반적인 윤곽은 유지되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인사동에서 가까웠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타면 창덕궁 앞에 내리는 버스가 학교 가기에는 편했지만.
일찍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나는 부득부득 종로 2가에서 버스를 내려 인사동 길을 거쳐가는.
버스가 더 붐비고, 시간이 더 걸리며, 한참을 걸어야 하는 등굣길을 종종 선택했었다.
억압당하는 듯했던 고역스런 학교생활을 대비하는 나름의 심리적 준비였달까.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복잡했던 종로에서 인사동 길로 접어들면 거리는 갑자기 한적해진다.
이른 아침의 인사동 길은 적요했다.
나무 덧문을 닫은 오래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단색의 길은 조촐하고 수수한 운치가 있었다.
그때 인사동의 주종을 이루었던 헌책방, 고서화, 표구점 같은 업종은 이미 사양길이었던 것 같다.
화랑도 있었고 골동품 점도 있었는데,
그때 인사동은 지금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거나 혼잡한 동네가 결코 아니었다.
근대기 서양식 건물도 있었고 타일을 붙인 신식 건물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상점가는 기와를 얹은 조촐한 목조 단층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길로 열린 전면은 대체로 나무로 틀을 짠 미닫이 유리문과 진열장이었다.
혼잡한 버스에서 심신이 지쳐버린 내가 등교하던 이른 아침에 그 유리문들은,
철제 셔터도 아니고, 함석 덧문도 아닌. 쪽나무를 이은 거무티티한 낡은 덧문들로 덮여 있었는데.
부대끼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인사동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정신이 든 나는,
그 나무 덧문들이 낡고 낮은 가게들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두리번두리번,
천천히 길을 지나며 차분한 아침의 인사동 정서를 흠뻑 누린다.
가려지지 않은 진열장의 붓과 벼루를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길에 나와있던 석물들을 한잠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그러다 길이 끝날 즈음에 있던 학원에 들어가는 재수생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아득한 시공을 헤매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와 씁쓸해지는 기분.
빠른 걸음으로 네거리를 빠져나오면 안국동 일대에 모여 있는 학교 학생들로 거리는 시커먼 교복 행렬이었다.
그렇게 인사동에서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 학교 길에 들어서면 기운이 달렸다.
가방은 무겁지, 다리는 후달리지, 아이고 숨차라.
저쪽 교문 앞에 나와계시는 학생주임 선생님이 보인다.
할머니 영어 선생님이었던 (응? 지금 내 나이만큼도 안 되셨을 텐데?) 학생주임 선생님은,
원피스 차림에 긴 머리를 곱게 올리고 교문을 지키셨다.
학생들의 차림새를 매의 눈으로 훑으며 선도(그 시절 용어임)하셨던 선생님은.
우리 교실에 일주일에 2시간인가, 짧은 수업을 담당하셔서 나를 알고 계셨는데,
유난히 나를 신경 써 주셨다.
살짝 삐딱선을 타는 이 학생을 좀 안타까워하신달까, 어여삐 여기신달까.
오늘도 교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저~쪽에서 느릿느릿 등장하시는 삐딱이에게 연신 빨리 오라는 눈짓을 보내시면서,
나를 지각에서 면하게 하시려고 교문을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닫게 하셨다.
그러면 나는 눈을 내리깔고 일부러 시선을 피하면서 교문아, 빨리 닫혀버려라.
공정하지 않은 호의가 싫어서 일부러 딴청을 부렸지.
이른 아침,
70년 대 중반.
인사동의 고요하고 기울어가는 연륜 있는 길이 품었던 한적하고 고아한 분위기는.
나름대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기존의 세상에 저항감을 품은 십 대에게,
마음 붙일 취향을 제시하면서.
미적 감각과 정서 형성에 한몫했겠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어냐,
따지신다면 굳이 할 말은 없지만.
그 길을 찾아다녔던 십 대의 내가 흡족하다는 뿌듯함은 지금 내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