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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un 18. 2020

전 지지는 풍경

음식에 관한 단상 27

명절은 집안 가득한 음식 냄새로 기억된.

나물 데치는 풋내.

갈비찜이 익어가는 짭짤 달콤한 냄새.

생선 다듬는 비릿한 냄새와 잡채를 마무리하는 참기름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방으로 스며들던 전 지지는 냄새.

마루에 여자들이 둘러앉아 지져내던 녹두전, 관자전, 대구전, 전, 동그랑땡, 버섯전, 고추전, 연근전, 호박전, 미나리초대...



전이 빠진 명절이 있었을까?

없이 치르는 잔치가 있었던가?

좋은 날, 흥겨운 날, 기쁜 날, 신나는 날.

그득한 밥상에는 갖가지 전이 수북이 담긴 접시들이 놓여서는,

들뜬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땅에서 자란 풀과 열매와 뿌리와 곡식 가루.

소와 돼지.

바다에서 나온 생선과 조개들, 오징어와 새우.

더해서.

시큼한 김치, 먹다 남긴 김밥도 기꺼이 전이 되어 다.

소시지와 햄 같은 남의 나라 출신들도 우리나라에 와서는 전이 되었다.

먹을 수 있는 어떤 재료든 우리는 전으로, 부침개로 만들 수 있다.



어렵기나 한가?

먹기 좋게 손질한 재료에 살짝 간을 하고 가루를 묻혀서는

계란 옷을 입혀 기름으로 달군 팬에 지져내면 끝!

찹쌀가루 차전이나 메밀가루 메밀전은 물에 개어 지지면 완성.

가루에 김치 다져 넣고 물에 잘 개어 지지면 시큼한 김치전이 된다.


좋아하는 재료 한 가지도 되고.

어울리는 재료 여럿이 함께 해도 좋고.

큼한, 달큰한, 짭조름한, 고소한, 아삭한, 매콤한, 덤덤한.

기름진 맛도, 상큼한 맛도, 꾸덕한 맛도.

재료에 따라 거의 모든 맛이 가능한 무한의 세계.



금방 만들어 뜨끈해도 맛있고.

식어도 날름날름 맛있다.

한꺼번에 만들어서 냉동한 것을 데우면 또 꿀맛이지.

이렇게도 저렇게도 자유자재.

융통성 있고, 구애받지 않는다.

값지고 귀한 재료도,

들에서 뜯은 파릇한 풀도 지지면 향긋한 전이 되고 부침개가 된다.

가리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전과 부침개는 특별한 날에만 먹 요리가 아니다.

손쉽게  우리 밥상에 오르는 친근한 반찬이다.

간식으로, 밤참으로, 군것질거리로도 전은, 부침개는 인기가 좋다.

고급 도시락 전은 등장하고,

급식에도, 편의 도시락, 시장 노점에서도 전은, 부침개는 스테디셀러다.



전은 우리들의 울적한 기분도 달래준다.

주룩주룩  내리는 퇴근길에 사람들은 자석에 끌리듯 전집 골목으로 들어선다.

술 한 병, 갓 지진 한 접시,

하루의 업무를 함께 한 동료들이,

오랜만에 연락된 동창들이,

기름 냄새 진동하는 시끌시끌 전집에 둘러앉았다.


사는 게 어디 쉽나.

자잘하게 긁힌 마음,

짊어진 무게의 중압,

앞이 안 보이는 막막함.

빗줄기건드려놓서글픔 서로서로 전 한 입 권하면서 다독다독 보살핀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다.

전을 좋아하셔서 명절 전날이면 

전 지지는 어머니 곁에 작은 술상을 차리시고,

금방 지져내는 따끈한 깻잎전에 술 한 잔 드시고는 하셨지.


애써 괜찮은 척, 힘이 센 척하셨지만.

여리고 예민한 아버지.

꿈을 꾸고 자유롭고 싶어 했던 아버지.

그러나 충실한 일상의 무게를 조금도 덜어 내지 않고

몽땅 짊어지셨던 아버지.



유난히 마음이 아린 이면,

늦게 퇴근한 아버지는 어머니께 전 한 접시 부탁하셨다.

어머니가 지져내는 동태전 한 접시 친구 삼아,

아내와 자식들에 둘러싸여 술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으셨다.


잘하고 있는 까?

제대로 가고 있는 가?

묻고 고민하고 갈등하셨겠지.

당신의 쓰린 심정 슬쩍 꺼내볼까도 겠지만.

아버지 마음공허함을 알 리 없는 철없는 자식들은

접시의 전만 낼름낼름 입에 넣을 때.

아버지께서는 자식들 앞으로 접시를 밀어 놓아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렸던 우리들.

그 시절 모든 것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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