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Sep 29. 2020

밤, 대추, 곶감, 은행

음식에 관한 단상 35

밤, 대추, 곶감, 은행.

가을에 얻을 수 있는 귀한 결실들이다.

제사, 차례상 고정 출연진이고,

음, 값이 좀 나간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값나가는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

아주, 무척, 굉장히...



옛날에 겨울 길거리에서는 밤 굽는 냄새, 고구마 굽는 냄새가 길가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시커멓게 재가 묻은 장갑을 끼고 연탄불에서 막 구운 군밤을 집게로 집어.

후후, 뜨거움을 쫓으면서

신문지로 만든 봉투에 담아주던 군밤장수 아저씨들이 떠오른다.


나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긴긴밤,

삶은 밤 소쿠리를 앞에 끼고는,

밤을 캭 깨물어 반을 갈라 찻숟가락으로 을 파먹었다.

으이그 저 밤 귀신,

우리 집 식구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지.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아삭아삭 생대추는 정말 맛있다.

붉은 반점으로 물들어가는 연둣빛 작은 열매를 딱 깨물면 은은하게 달콤한 기가 입안에 확 퍼졌다.

생대추가 올라가는 추석 차례상은 예쁘고 싱그럽다.


두고두고 먹는 말린 대추는 또 다른 맛이다.

쫄깃한 식감과 진득한 단맛은 그냥 먹어도 맛있다.

수정과에도, 약밥에도, 쌍화탕, 떡, 갈비찜에도 들어간다.

한약의 쓴맛을 달래주는 데도 일등 공신, 대추를 듬뿍 넣어 끓이는 대추차는 겨울 추위를 이길 수 있게끔 몸을 따듯하게 해 준다.

결혼식 끝나고 신랑 신부 폐백 상에 대추를 실로 이어 높이 고였다.

새 부부가 집안 어른들께 절을 올리면 듬뿍 대추 줄을 뚝 끊어 신부 치마에 던졌지.

아들, 딸 잘 낳고 행복하게 살아.



호랑이도 못 참는다는 곶감은 또 얼마나 맛있나!

겉에는 물기가 말라 쫄깃쫄깃하면서도 안에는 부드러운 연시의 맛이 남아 있다.


아삭한 단감도 맛있고,

입과 손이 엉망이 되더라도 달콤한 연시도 좋다.

하지만 여러 달 말린 곶감은 더 좋다.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어 행운이다.



어릴 때는 은행 맛을 몰랐다.

커서 먹어보니 담백하면서도 살짝 톡톡한 맛이, 딱 내 입맛이야.

한동안은 매일 먹었다.

어머니랑 둘이 먹을 은행 개수를 세어,

많이 먹으면 안 된다니 거, 참 안타깝군.

달군 팬에 기름 두어 방울 뿌려서 은행을 슬쩍 는다.

뜨거운 은행을 호호 불면서 속껍질을 벗긴다.

음 맛있어.


아산, 곡교천 옆으로 은행나무 길이 있다.

꽤 잘 자란 굵은 은행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높이 뻗어있다.

여름에 짙푸른 이파리가 무성할 때도 하늘로 곧게 뻗은 푸른 길은 참 아름다웠다.

이파리가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에 간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은행나무 단풍이 들기 전 은행을 털어 내는가 보았다.


나무 데크로 잘 정리된 길은 걷기에도, 보기에도 좋다.

그 옆으로 느릿느릿 들판을 흐르는 곡교천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가을이 되면 산과 들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풍요의 계절.

봄에 밭을 갈고 여름 내내 땡볕에서 풀과 나무를 돌본 사람들이 드디어 결실을 얻는 시기.


모두들 힘들게 보낸 2020년.

이 가을에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기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꿀빵센터, 미리내, 태극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