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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Sep 09. 2020

꿀빵센터, 미리내, 태극당

음식에 관한 단상 34

한창 클 나이, 참 많이도 먹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꼬박꼬박 잘 먹고.

푸짐하게 도시락 싸가서 싹싹 긁어먹고.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둔 간식 금방 해치우고.

밤에는 밤참까지 야무지게.


중학생부터는 자체 조달을 더했지.

학교에는 매점이 있었다.

교실이랑 다른 층에 있어서 쉬는 시간 실내화로 미끄럼을 타면서

심장이 터져라, 매점까지 왕복 달리기를 했었다.

뭘 먹었더라?

빵은 보름달, 아이스케키는 비비빅이 언뜻 떠오른다.

이것들만 먹었을 리는 없는데.


언덕에 있던 학교에서 내려오면 큰길까지 주택가가 죽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드문드문 분식집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큰길에 버스 타러 가면서 매번 분식집에 들렀다.

엄청나게 떠들어대는 동시에 폭발하는 식욕에도 

응답했는데.

특히 군만두를 좋아했다.

그때 친구들이랑 20년 뒤, 30년 뒤의 오늘 어디서 우리 꼭 만나자, 약속하고 그랬었는데.

(학교에서 큰길에 이르는 꽤 넓은 지역이 먹자골목이 되어 있더라. 깜짝 놀랐다. 와)



고등학교 때도 학교 매점은 기본적으로 단골이었지만,

머리가 굵어진 만큼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학교 에는 분식집이 없고 골목 초입에 빵집이 있었다.

거의 매일 드나들었...

소보로빵(그때는 곰보빵이라 불렀다.), 크림빵, 슈크림, 사라다빵, 크로켓(요건 '고로케'라 해야 실감 나지) 등등

크기가 큰 맘모스빵은 과외 갈 때 사갔던 빵.

과외 수업 갈 때마다 다 같이 먹을 빵을 사 갔더니 선생님은 우리 집에서 빵집을 하는 줄 아셨다.


간식 조달의 새로운 방법도 찾아냈다.

학교 부근에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몇 년 전까지 여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면 퍼에 가서 땅콩버터, 딸기잼, 식빵, 크래커, 사탕, 초콜릿 등등 간식거리를 잔뜩 사 왔다.

친구들이랑 신나게 먹고,

남은 건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이라야 뻥 뚫려있으니 다음 날 등교하면 반쯤 사라지곤 했는데.

어차피 애들이랑 나눠먹을 요량으로 두었던 것이라 개의치는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딸이 밖에서 배고프지 말라고,

피곤하면 택시 타라고 용돈을 넉넉히 주셨다.

나는 돈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지갑 비지 않게 용돈 잘 주신 아버지 탓은 아니에요.

각 없었던 제가 문제.



중학교 때는 시내 유명한 분식집으로 원정도 다녔다.

신문로 한옥집에 사는 친구가 있어서 친구 따라 광화문 주변에 있던 미리내, 당주당?

서울 시내 중학생이면 죄다 아는  분식집들을 순례하기 하고.

(남학생들도 많이 오는 데라 인상 잔뜩 쓰고 들어갔었다.)


언니 따라 인사동 꿀빵센터에 가기도 했는데,

유명했던 꿀빵센터는 내가 근처 고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이미 사라졌더라.

대신 종로에 있던 큰 빵집인 태극당, 고려당에 종종 다녔다.


자리는 옮겼지만 태극당은 여전해서 가끔 일부러 찾아간다.

내 사랑 모나카 아이스크림, 고로케.

요새는 화려한 빵집들이 고급스러운 재료로 최신식의 빵들을 만들어내지만.

예전의 소박한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 시절에는 대개들 정말 어렵게 살았는데.

그래도 아이들 코 묻은 돈을 겨냥했던 분식집들도 번창했고, 빵집들도 잘 됐다.

교복 입고(동복 소매 끝은 때가 반질반질했지.),

그 무거운 가방 들고.

먼지가 뽀얗게 앉은 검정 구두 신고.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들면서 동시에 입으로는 음식이 들어가는 신공을 발휘하셨던.


신나게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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