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바라보는 네 계절, 겨울

마음에 남긴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예전에 1년 남짓.

한 달에 한두 번, 많게는 네 번까지 기차를 탄 적이 있었다.

도시에서 도시를 오가는 가는 단지 이동일뿐이었는데.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느슨한 시간이 좋았다.

오가며 그렇게,

그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더니.

마음에는 어느새 계절의 풍경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네.


서울을 나가 한참 지나기까지.

건물들과 건물들, 도시와 도시가 연이어 있어서.

도무지 서울을 떠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산과 들을 통틀어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과,

빡빡한 간판들과, 잿빛 길들과 자동차들로 채워진 삭막한 풍경은 계절의 변화에 무관하다.

기차가 완전히 수도권을 빠져나온 뒤에야 비로소.

창밖으로 너른 들판이 있고 푸른 산이 보인다.

사이사이 중장비가 작동하는 건설의 현장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긴 하지만.

휴,

그래도 숨통은 트인다.



겨울은 길다.

정말 길다.

그러니까 나무에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서 어두운 갈색 줄기가 그대로 드러나고.

푸른빛이 사라진 풀들은 누렇게 말라 쓰러져있는.

땅에는 서걱서걱 낙엽이 쌓여서 때때로 찬바람이 휭휭 들판을 지나가지.

풍성함을 모두 거둬들인 스산한 들판으로 겨울은 시작된다.


오직 본질만으로 목숨을 지켜내는 시간.

자연의 활발한 생명 활동이 사라진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가려진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의 집들은 초라해 보인다.

실용으로 지어진 멋없는 시멘트 건물들과,

사방으로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검은 길들은.

휘익 휘익 불어대는 바람에 실려온 먼지들로 뿌옇게 덮인다.

빗물이 씻겨주지 않은 세속의 분진을 풍경은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쓸쓸하게 추위가 깊어간다.



매서운 냉기로 오들오들 떨리는 플랫폼에서 차가워진 얼굴에는 콧물이 찔끔.

열차가 도착하면 허둥지둥 객차에 올라 내 자리를 찾는다.

어우,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고 목도리를 풀면.

붉게 상기된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얼음이 얼고, 세찬 바람이 부는 맨몸의 들판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황량하게 비어있는 땅은 꽁꽁 얼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앙상하게 검은 줄기만으로 한파를 견디는 나무들은 힘겨워 보인다.

기차가 달리는 들판으로 바람이 휙 불어 가면,

산기슭에 쌓여있는 낙엽더미는 움찔움찔.

마르고 말라 가벼운 이파리들이 훅훅 날아다니더라.

견디기 어려운 추위에 연신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은,

불모의 대지.

얼어붙은 강.

구름이 지나가면 휘영청 밝은 달빛만 서늘하니.

사람들은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꽁꽁 닫는다.



어설프게 첫눈이 내렸다.

눈은 금방 녹아버리고, 추위만 더해졌다.

다시 자는 밤중에 눈이 내린다.

새벽까지 날리던 눈은 길에 제법 쌓였다.

아직 캄캄한 이른 아침.

부르르 몸을 떨면서 눈을 밟으며 기차역으로 향했는데.

오, 기차가 달리고 얼마 뒤 숲을 지날 때. 세상은 돌연 흑백으로 바뀐다.

대지에 하얗게 쌓인 눈과 꿋꿋하게 버티고 선 검은 나무줄기들과 희끗희끗 덮인 하얀 서리.

그 사이를 아련하게 감도는 차가운 안개.

농도를 달리 하여 풍경을 드러낼 듯 감출 듯 흐릿한 흑백의 실루엣에,

숨이 탁 막히면서 어쩐지 사무치는 심정이 된다.

수묵화 같다?


본격적으로 펄펄 눈이 내려서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버렸다.

온통 눈 세상이다.

쓸쓸하니 처량하던 겨울 들판은 갑자기 화사해진다.

순백으로 반짝반짝, 빛으로 가득한 은빛 세상이라니.

고개를 내밀면 얼음장 같은 차가움으로 움찔하겠지만,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하얀 들판은 눈부시게 환하기만 하다.

마을의 작은 집들은 지붕에 하얀 눈을 이고.

침엽수 굵은 나무들은 제각기 감당할 만큼의 눈을 얹고 있다.

세상의 모든 누추함, 모든 더러움, 모든 볼썽사나운 것들은 하얀 눈이 덮어버리고.

오직 순수한 흰색으로 세상은 아름답게 빛난다.

마법이야!



해가 바뀌고 입춘이 지났다.

지난해 늦은 가을, 첫추위가 온 날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춥기도 하다.

이제 양지바른 땅은 눈이 녹아 질척거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집들은 얼룩져있다.

남녘에서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나무에는 물이 오른다는데.

여전히 대지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황량하고 초췌한 겨울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거운 겉옷은 이제 벗어던지고 싶다구.


그런데 이상해.

어쩐지 죽은 듯 검은 나무에는 조르르 생기가 흐르는 듯하고.

햇살이 비추는 누런 풀밭에도 활기가 도는 것 같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등 뒤에서 가물가물 일어나는 느낌이네.

아리송하군, 착각인가.

다시 들여다보면 들판은 퍼석퍼석, 눈 녹은 땅은 질퍽질퍽.

휭휭 매서운 추위에 황량한 들판은 여전히 숨죽인 겨울 풍경일 뿐인데?


부지런한 농부는 땅을 갈고.

성급한 사람들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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