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에 아는 분 농장이 있었다

마음에 남긴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콩 줄기를 베어 말리는 사진을 보았다.

아, 그래, 추수철이구나.

가물가물 기억 속에서 초등학생 적 한때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생 때 부모님 아는 분이 벽제에 농장을 만드셨다.

커다란 저수지까지 파서 나중에 유료낚시터까지 하게 되는 꽤 큰 규모였다.

여러 작물도 심고 집도 지어서 우리는 자주 가서 놀았고.

때로는 아이들만 보내시기도 해서 우리들은 며칠씩 농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농장주인 가족은 생업이 따로 있어 서울에 살면서 농장에는 오며 가며 하셨는데.

농장에서 일하시는 가족이 다른 채에 살고 있어서 우리에게 밥도 맛있게 해 주셨다.


농장의 장면은 여러 계절이 떠오른다.

언니 친구들까지 같이 갔던 겨울방학.

장작을 때던 뜨끈뜨끈한 방에서 나는 이불속에 가만히 누워 있고.

고등학생이 되었던 언니 친구들은 등을 보이며 둘러앉아서 무지막지 떨어대는 수다를,

귀만 쫑긋 세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뭐 선생님들 흉보고, 친구들 얘기하고, 분식집 품평에다 놀러 다닌 자랑질,

무서운 십 대들의 세상 만평들.



넓고 넓은 농장에서 우리는 거칠 것 없이 마음껏 뛰어다녔다.

얼마나 신기했게요.

한 번은 그 집 오빠가 저수지에서 낚시하면서 곁에서 구경하던 내게도 낚시를 가르쳐주었다.

낚싯대 끄트머리에 떡밥을 뭉쳐서 바늘을 감싸고.

휙, 힘차게 낚싯대를 돌려 물에 넣는다.

응시한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또 기다린다.

한참 뒤에 까딱까딱 흔들리는 찌.


와, 물었다.

입이 헤벌쭉,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낚싯대를 건져 팔딱팔딱 뛰는 어른 손가락만 한 물고기를 내 손바닥에 놓아준 오빠랑 농장 아저씨는,

껄껄 웃으면서 눈먼 물고기라고 하신다.

응?

나는 작은 물고기의 더 작은 눈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눈이 잘못된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참 많이 궁금해했었다.

이 사람들아.

애를 놀리면 쓰나!



요즘 같은 쌀쌀한 가을이었다.

아저씨가 오셨다.

너희는 이런 거 모르지, 시골 맛을 알려줄게.

하시더니.

콩밭에 들어가 콩줄기를 쓱 잡아당겨 빈터에 한 무더기 쌓아 놓고는 불을 질러 태우셨다.

흥분해서 호기심으로 불 옆에 바싹 붙어 있자니,

아, 매캐한 연기.

한참을 붉은 불꽃과 매운 연기를 피우며 타닥타닥 타들어가던 콩줄기 더미는 점차 사그라들고.

발로 밟아 마지막 불길까지 끈 아저씨는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아직 뜨거운 콩깍지를 후후 불어 나눠주셨다.


처음에는 불에 탄 뜨거운 콩깍지를 만진 손이,

그다음에는 깍지를 열어 나온 달고 고소한 콩을 넣은 입 주변이.

쌀쌀한 바람에 찔끔 흘러나온 콧물을 쓰윽 닦은 얼굴이,

그을음으로 차례차례 시커멓게 묻다가.

결국에는 손을 문질러 닦은 옷까지 온통 시커멓게.

그렇게 연통을 빠져나온 새앙쥐 모양이 된 꼬질꼬질한 아이들은 서로의 모습을 놀리면서 깔깔깔.

입에 넣은 맛있는 콩알이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웃어댔다.



그날 구운 콩 참 맛있었는데.

아, 또 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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