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풍경

마음에 남긴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내가 자랄 때 겨울 풍경은...

길가에 군밤, 군고구마의 구수한 냄새로 시작되었다.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군고구마 통에는 쪼개진 장작이 들어가 파닥파닥 빨간 불꽃을 일으키고.

손수레에 연탄 화덕을 얹은 군밤 장수는 시커메진 목장갑으로 얼기설기 그물 모양의 구이 채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노릇노릇하게 군밤을 구워냈다.


돈을 내밀면 액수에 따라 크기가 다른 신문지로 만든 봉투에 뜨거운 군밤 또는 군고구마를 넣어 주었는데.

습관처럼 '에이, 좀 더 주세요' 하는 고객의 말이.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분들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었을지.

털이 짓눌린 모자에 옷을 잔뜩 껴입어서 중무장을 하고.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 굴리면서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북풍을 거리에서 견디던 그분들은 지금 어찌 살아가실까.



동네를 흘러가던 개울은 업자들이 일정한 부분을 막고 시간을 들여 얼음을 고른다.

각목을 대어 천막을 설치하고, 군고구마, 어묵, 가락국수 좌판이 펼쳐진다.

반짝반짝 오색 장식 줄이, 깜빡깜빡 작은 전구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드디어 신나는 음악을 크게 크게 틀어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검은 고양이 네로')

다음 해 입춘이 지나 얼음이 풀릴 때까지.

동네 아이들, 학생들은 빙글빙글 스케이트의 행렬을 그렸다.

가끔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도.

더 가끔은 자랑스러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젊은 연인들도 손을 잡고 끼어들었지.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모든 소음을 제압하고.

동네 교회마다 트리를 올리고 빨간 얼치기 산타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흥겨운 시내에 사람들이 몰려서 강물처럼 마냥 거리를 걸어 다니고.

그래서 성탄절 즈음부터 연말연시는 왠지 들썩들썩, 실실 웃음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집에 오시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종합 선물세트'라고,

과자 회사에서 나온 선물꾸러미를 주셨는데.

꾸러미에는 잘 팔리는 또는 팔리지 않는 과자들이 몽땅 들어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각자 다르면 괜찮겠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방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려고 시끌시끌했지.


거리에는 어두워지면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이 꼭 있었다.

길에 쓰러져 쿨쿨 잠이 든 취객은 '이봐요!' 경찰서로 끌려가고.

(음, 재수 없게 새해 첫날 신문 1면에는 대통령 가족사진이 커다랗게 실렸었다.)



추위가 올 무렵 온 식구가 총출동해서 담갔던 김장 김치는 잘 익었다.

매일 아침부터 어머니는 땅에 파묻은 김장독에서 빨간 김치 한 포기, 시원한 동치미, 사각사각 깍두기, 쫄깃쫄깃한 총각김치를 꺼내어서는.

김칫국, 김치찌개, 김치볶음, 김치밥, 만두, 비지찌개, 국수...

맛있는 김치 음식을 상에 올리셨고.

우리들은 일 년 동안 큰 키를 자랑하면서 이젠 언니가 되었다고 뻐겼지.


하얀 눈이 쌓인 새해가 되었다.

언니가 입던 색동 치마저고리를 물려받아 얌전하게 차려입고 아이들은 세배를 올렸다.

(거기에 더해 나는 토끼털이 들어간 배자까지 차려입은 사진이 있다, ㅋ)

떡국 한 그릇 배불리 먹고 한 살 나이도 더 먹고.

한 학년이 올라가는 새 학기를 기다렸는데.

어서 어른이 되기를 조급해했던 시절.

어른이 되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알 턱이 있나.



어느새 반세기가 지났구나.

날이 하루새에 갑자기 추워졌다.

롱 패딩을 꺼낸다.

너는 이제 봄이 올 때까지 나와 한 몸이 되겠지.

코로나 19는 날로 극성이다.

암담함.


우리의 겨울 동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새해를 맞는다.

움츠려 들고 축 쳐진 기분이지만.

그래도 새해는 기쁘다.

참으로 힘들었다, 2020년.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위로를.

방역 당국과 관련 업무를 보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서 오라, 2021년^^

현실은 어렵더라도 다시 기대를 품고 각오를 다지면서.

모두 모두 설레어 더 나은 새해를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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