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싹 밀어서 높은 곳은 깎아 버리고, 울퉁불퉁한 곳은 쫘악 펴서는.
반듯반듯 평평하게 건설하는 신도시나 재개발 지역은 건물과 길의 경계가 분명한데.
오래전에, 작은 단위로, 단독주택으로 시작된.
언덕이 있고, 가게들이 있고, 오래된 단독주택들과 빌라들과 아파트가 섞여 있는 동네에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여러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잘 정비된 큰길도 있고.
주택과 가게들이 뒤섞인 골목이 있고.
몇 집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막다른 골목도 있다.
길들은 눈에 확 띄기도 하고.
늘 다니는 동네 사람들만 아는 숨어있는 길도 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경로가 안내되는 세상에서,
평면으로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가보니 경사가 급하다든가.
재개발을 기다리느라 으스스하다든가.
아무튼 예상과 다른 의외성이 있다.
그래서 재미있다.
한동안 집을 여러 곳 옮겨 다녔다.
새로운 동네에 가서는 마치 여행자처럼 신선한 의욕과 호기심을 갖고 동네를 탐색한다.
이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이쪽을 샅샅이 훑어보고.
저쪽에는 또 어떻게 생겼나, 알고 싶어서 기웃거린다.
작은 가게마다 들락거리면서 평가를 하지.
그래서 두어 달 지나면 맛있는 빵집, 싱싱한 과일가게, 친절한 세탁소로 단골가게를 만들고.
역시 스마트폰으로 알아낸 버스 노선으로 여기저기 다녀보면서,
길이 밀린다거나 가로수가 무성해 다닐 만한 길이 더라든가 하는 소감을 갖게 된다.
가까이 꽤 괜찮은 공원이나 다닐 만한 산책길을 찾아내는 기쁨이란!
내가 이곳을 출발해 목적지인 저기까지 가는 방법이 세 가지쯤 있더라,
하면서 오랫동안 다녔는데.
어느 날 문득 실수라던가 혹은 몹시 무료해서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오, 다른 길도 있었네, 발견했다!
유리 미닫이 문들이 삐걱거리는 먼지 낀 방앗간과,
동네 할머니들이 죽치고 앉아계신 미장원.
가게 안팎으로 아무렇게나 물건이 흐트러진 만물상이 있고.
어느 집 대문 위에는 꽃이 활짝 핀 화분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조르르 놓여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새 나오는 미술학원과 피아노 학원도 있어서 막, 막 재미난 길.
지루한 여름날,
반바지에 슬리퍼를 걸치고 나선 동네 한 바퀴에서 몰랐던 곳을 탐험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기념으로, 재잘재잘 키득거리는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아 나도 튀김 한 접시.
늘 바쁘고, 기운이 달리고, 비용이 빠듯하면.
실패할 위험이 적은 정해진 길, 아는 길, 안전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실패를 각오한다는 건 기댈 언덕이 있을 때나 얘기라면서.
이 길이 제일 좋은지, 편한지, 아름다운지...
알 도리가 없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눈앞에 보이는 길만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겠는가.
그래서 본인들 소견에 제일 좋아 보이는 길이라고 자식들을 몰아넣는데.
그 길이 정말 좋은 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길은 가보지 못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