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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Feb 22. 2021

자연 속으로

활자로 만난 인물들

[숲에 사는 즐거움], 베른트 하인리히 글, 그림.  

김원중, 안소연 옮김, 사이언스 북스,



베른트 하인리히미국의 생물학자이다.     

1940년, 당시 독일 치하로 보로브케라 불리던 지금의 폴란드 바트 폴진에서 출생하여,

2차 세계대전 중 고향을 떠나 독일을 거쳐 1951년, 미국에 정착했다.


동물행동학 분야의 저명한 생물학자로 버클리 대학 교수였는데.

30대 말의 나이에 전기도, 수도도 없는 메인 주 숲 속으로 돌아가 혼자 통나무 오두막을 지었다.     

그 뒤 무한한 자유를 허락받은 버몬트 주립대학 교수로서,

대자연 속에서 일정 기간 캠프를 열어 전공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홀로 벌을 치고 농사를 짓고,

숲의 동물들을 관찰하며.   

벽난로 곁에서 책 읽고 일기 쓰는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여러 생물체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들을 다수 썼.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어 있.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칠순이 넘어서 낸 책이더라.

글을 참 잘 쓰시는 분.


[숲에 사는 즐거움]벌, 쇠똥구리, 털벌레, 겨울 나방 같은 생물체에 관한 연구 내용과 함께, 

자신의 성장사를 담고 있는데.

저자의 세계관이나 인생관도 어렴풋이  수 있었다.     



아주 어릴 적 눈 내리는 날,

옷을 겹겹이 껴입고 약간의 여벌 옷과 먹을 것, 증조할아버지의 시계와 사진첩만을 가지고 어둠 속에 마차를 몰아 고향을 떠나서.     

기아와 위험겪으면서 간신히 독일닿았다.

난민으로 함부르크 인근 한하이데 숲 오두막에서 5년을 지내야 했는데.  

궁핍했지만 마음껏 숲을 뛰어다니며 생물들에 호기심과 즐거움을 느끼고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 메인 주에 정착할 수 있었는데,

부모님이 별난 분들 이어서,

저자는  10대에 들어선 나이에 자립 기숙학교 농장에서 근로하면서 중등 과정보내야 했다.

힘들었던  시절에 저자는 메인 주의 대자연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했고.

‘나의 공부, 나의 건강, 그리고 어쩌면 나의 삶이 달리기 속에서 유지되어 왔’ (321쪽)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멀리까지 가기를 원한다면 전력 질주해서는 안 되고, 숨을 참아서도 안 된다. 경주 중에 시도되는 전력 질주는 권장 사항이 아니다. 전력 질주는 막판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기력이 다했을 때 산소 부채를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180쪽)           

라고 학자로서의 의견을 밝히는데.


목표를 정하고 그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시작은 상상력과 결합된 꿈이고.

매일매일의 원동력은 강렬한 내면의 기쁨이며.

계산이나 이익이 아닌 순수한 열정과 신념이 달리기를 계속하게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생명체들에게 있어서 놀이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놀이를 통해서 다양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숙련된 기능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은 지리멸렬하면서 고달픈 장거리 경주이고.

대부분 우리들에게 '신념'이란 가물가물 하지.

당장 눈 앞의 생계에 매달려 '내면의 기쁨'이나 '순수한 열정'은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상업적으로 부추진 사소한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자랑하여 작은 부러움을 사는 것으로.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누르고

걱정과 시름을 저편으로 치워버릴 뿐.


저자의 삶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몸의 편안함이나 물질의 소유, 또는 명성을 구하는 데 인생의 의미를 두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에게 충실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 실행하 모습에서 우리는 용기를 얻는다.

책에볼 수 있는, 숲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대한 엄숙한 의지에 감탄하고.

동시에 저자의 자유로우면서도 철저하며 세속적인 가치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되는 코로나 시국에,

자의 말씀을 되돌아보자.


세계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러모로 경제와 관련되지만, 경제학자가 보는 시각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생태학자는 훨씬 더 큰 공동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데, 이 공동체는 그 스펙트럼의 서로 다른 지점마다 비용과 이득을 수반하는 경제 거래나 에너지 흐름을 갖는 다양한 생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과 다른 에너지 흐름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적은 비용으로 수익을 빨리 올리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그 자체의 되먹임(feedback)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진정한 비용은 숨겨져 있으며 바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호 작용을 하는 부분의 연결망이 더 크고 복잡할수록 되먹임 지연 현상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지연되었던 되먹임 고리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161~162쪽)           



경제학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들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 지구 상의 모든 존재들과 자연의 움직임이라는 방대한 차원의 상호작용을,

 원인과 결과, 진행 방향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터.     

경제학자들의 계측 범위를 벗어난 차원에서,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우연 혹은 운명, 또는 신의 뜻이 되어 결국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문제로 돌아올 것이고.     

그 범위까지 고려해 지금 우리의 행위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겠다.       


지구는, 우주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길고 넓은 차원의 커다란 단위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네, 하면서 잘난 척, 우쭐우쭐.

자연에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해대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나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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