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11. 2021

추락의 기록

활자로 만난 인물들

[낙타 샹즈], 라오서 지음,

심규호. 유소영 옮김, 황소자리



작가 라오서는 1899년 베이징에서 가난한 만주족 말단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이징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1924년 런던대학의 동방학원 중국어 교수에 부임한다.

5.4 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1929년 런던을 떠나 1930년에 귀국, 산동대학에 근무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1936년에 쓴, 이 소설 [낙타 샹즈]가 그의 대표작이다.

1966년, 작가는 문화혁명으로 가혹한 고통을 당한 뒤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도가 남경으로 옮겨가 베이핑이라 불렸던 시대,

1930년 대 베이징이 배경이다.

부패했던 청조는 망했고.

간신히 세웠던 중화민국은 혼돈의 도가니.

중국 대륙은 땅으로, 세력으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외세는 극성이고 일제가 침략했는데.

정부도, 군벌들도 서로의 몫을 다투기만 한다.

소란 속에서 내팽개쳐 사람들은 각자도생, 약육강식. 야수보다 못한 세상이었다.


소설은 이 시대 '샹즈'라는 인물을 따라간다.

'농촌에서 자란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그나마 있던 몇 마지기의 척박한 땅마저 잃자 열여덟 나던 해에 무조건 도회지로 뛰쳐 들어왔다.'(11쪽)


적수공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어차피 바닥에 있는 샹즈가 떨어지 얼마나 떨어지겠냐고 묻겠지만.

이 소설이 그의 추락기가 되는 것은 존재의 문제이다.

비록 가진 것 없는 촌뜨기였지만 고귀한 마음을 지녔던 순수한 청년이 어떻게 타락해가는가,

책을 읽는 내내 샹즈를 지켜보는 마음이 아프다.



'그는 지옥에 굴러 떨어져도 착한 귀신이 될 듯한 사람이었다.'(11쪽)


우직하고 성실한 샹즈.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도시에 나온 샹즈는 남의 인력거를 빌려서 끌게 된다.

죽어라 일하고 먹지도 않고 몸이 아파도 약값을 아끼면서 지독하게 3년을 보낸 뒤에 드디어 자신의 인력거를 살 수 있었다.

'인력거를 산 이후 샹즈는 더욱 잽싸게 달렸다.'(21쪽)

꿈에 부풀어 신나게 인력거를 끌던 즐거운 샹즈.

샹즈의 삶에서 일어나는 잠깐의 행복은 곧바로 가혹한 불행을 불러오는 전주곡이 된다.


샹즈와 인력거는 병사들에게 끌려가게 되고.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살아 나왔나 싶더니 그의 성실성을 알아본 야비한 인간들은 샹즈를 이용만 한다.

고되게 일하지만 돈벌이는 힘들고

이리저리 짓밟히는 마음은 참혹하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 가중되는 고통스럽절망스러운 나날.

지쳐가던 샹즈는 인품이 좋은 챠오 선생 댁에서 인력거를 끌게 되면서 온화한 마음을 되찾고.

한 푼 두 푼 모으면서 다시 희망을 꿈꾸어보는데.



위태로운 정국에서 샹즈가 애써 모은 몇 푼은 날강도 같은 놈에게 빼앗기고.

마음에도 없는 불량한 여자 손아귀 걸린 우직한 샹즈는 채찍질당하는 병든 말의 신세가  만다.

불행하지만 여전히 착한 마음을 지닌 샤오푸즈에게 처음으로 절절한 사랑을 느끼지만.

생계가 막연한 샹즈에게 행복이란 감히 바랄 수 없는 꿈이다.


샹즈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확실히 나무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튼튼하고 아무 말도 없었으며 또한 생기발랄했다. 자신의 계획과 나름대로 몇 가지 속셈도 있었지만 그는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처럼  쓸데없는 잡담이나 욕설을 배울 마음이 없었다.....  입을 늘 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의 눈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마음에 결정을 내리면 마음속에 어놓은 길을 따라갔다.(13쪽)



희망을 잃은 샹즈는,


....  자꾸 편안한 것만 생각했다. 바람이 불거나 비만 와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몸이 조금만 쑤셔도 2~3일을 쉬었다. 자기 연민은 곧 이기적인 마음을 불러왔다.(326, 327쪽)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이기에 그러는 자신의 모습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겪어냈던 인생은 그에게 아니라고 말한다.

"나라고 노력 안 해본 줄 알아? 그래 봤자 털끝만치도 남은 게 없잖아."(327쪽)



경험은 삶의 비료  같은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사막에서 목단이 자랄 수 없다. 샹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른 인력거꾼보다 낫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인력거꾼다운 인력거꾼이 되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홀가분했다.....  까마귀는 그냥 까만색이다. 그는 혼자 하얀 깃털을 갖고 싶지 않았다.(330쪽)


챠오 선생과의 인연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희망에 들떠 샤오푸즈를 찾으러 갔지만,

그녀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샹즈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지독하게 가혹한 고난을 이겨내라고 설교하지 말라.

이겨낸다 해도 이미 내면은 갈기갈기 찢겨서 흉측한 괴물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며.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쓰러질 수밖에 없는 혹독한 삶을 지탱하고 성공까지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그 특별함을 모두에게 기준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고 샹즈가 없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찌질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