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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pr 14. 2021

유배지에서 살아내다.

활자로 만난 인물들

정약용의 『뜬세상의 아름다움』/정약용,

박무영 역, 해설, 태학사,



종종 우리는 감옥인 듯, 심심산골 귀양지인 듯.

도무지 빠져나올 길 없는 수렁에 갇혔다는 울분을 느낀다.

몸은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데 나는 한없이 무력하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이다들 알지.

그는 인생의 정점에서 급격히 낙하하여 머나먼 남쪽 땅에서 길고 유배생활을 견디어야 했.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견디어낸 다산의 시간을 돌아보자.

다산이 쓴 책을 직접 읽으면 좋겠지만,

먼저 해설서를 보기로.

좀 길어요^^



다산은 젊은 시절, 국왕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날아오르던 ‘장래 재상 감’이었다. 정조는 그를 드러내 놓고 자랑하였고, 비호하였다. 조선조 사회개혁을 꿈꾸던 이 학자 군주와 의기투합하여서 자신이 믿는 바 개혁을 실현하리라는 포부에 차 있던, 그것이 보장되어 있는 듯이 보였던 시절이었다. (23쪽)


공공을 위한 이상을 실현하려 한창 열심히 일하던 인생의 정점에서,

다산은 뜻이 맞았던 왕을 잃고,

권력 투쟁에 희생되어 집안은 풍비박산이 다.

억울하게 죄인의 칼을 쓰고 멀리 유배를 떠난다.

나이 마흔에, 그로부터 18년.

마음을 가누기도 어려울 만큼 길고 고달픈 시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꺾지도 않았고,

권력의 은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모진 수모와 슬픔을 묵묵히 견디면서.

지극히 간소하고 본질적인 생활을 이어가면서.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피며.

자신의 정신세계를 확장시키고 마음을 닦았다.


미처 실현할 수 없었던 개혁의 꿈은,

용광로에서 불의 세례를 받으며 단련되는 쇳물처럼,

다각적인 검토와 깊은 고민을 통해 광대한 저작담았고.

류에 올라타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려는 사소한 삶이 아니라,

끝까지 세상을 위해 옳다고 믿는 것, 구현되어야 한다고 희망하는 것에 헌신했다.




저자는 꿈에서 미녀를 보았던 다산의 일화를 소개한다.

다산은 유교적 엄숙함이라는 위선에서 벗어나,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욕망은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러나 본능적인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승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산은 인간적인 가치를 실현하려 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1784년 회현 방에 거주하던 23세 때 이런 일화도 있다.

오랜 장마로 식량이 떨어져 호박죽으로 연명하던 중, 호박마저 떨어졌다.

계집종은 옆집 텃밭에서 호박을 따서 죽을 끓여냈고,

아내 홍 씨가 이를 나무라며 하녀에게 매를 들자 다산은 탄식한다.  

"만 권의 책을 읽은들 아내가 배부르랴, 두 이랑 밭만 있어도 계집종이 죄짓지 않아도 될 것을.“(20쪽)


젊은 다산은 가장으로서, 식솔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서 하는 독서, 치국평천하의 포부가 얼마나 허상인지, 배고파 고작 호박 하나를 도둑질한 어린 계집종을 윤리를 들어 꾸짖고 매질하는 짓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인가를 외면하지 않고 고백한다. 『가난』이란 시에선 솔직히 말한다. “안빈낙도하리라 말을 했건만, 막상 가난하니 ‘안빈’이 안 되네. 아내의 한숨 소리에 그만 체통이 꺾이고, 굶주린 자식들에겐 엄한 교육 못하겠네.”(19쪽)



다산의 저작들은 대부분 유배기에 저술되었거나,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초고가 마련된 것들이다. 그의 저작들은 유배 초기에는 극도의 경제적 곤란과 외로움 속에, 외가인 해남 윤 씨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찾았던 유배 후반기에는 육체적으로 무너져가는 고통 속에서 작성된 것이다.    

현실적 개혁에의 의지가 실현의 길을 봉쇄당하자, 저술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완성시켜 남겨 놓으려는 불굴의 열정으로 개화하고 있는 것이다. (25쪽)


분노와 좌절의 열정을 저술에의 에너지로 전화시켜간 놀라운 의지 이면에 있는 처절한 슬픔을 감지하게 된다.

이 슬픔의 한편엔 자신으로 인해 사람 행세를 하며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아들들에 대한 쓰라린 회한이 있다. 첫 유배지인 장기에 도착해서 아들들에게 쓴 첫 편지에서 다산은 말한다.    

내가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서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 (29쪽)  




 다산은 인생을 즐기려 했다.

그것이 생존 차원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이룩하는 ‘문화’의 기본 요소로 보았다.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했지만, 다산의 생각에 인간다운 삶이란 문화의 관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화의 관념에 기본이 되는 것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추구할 줄 아는 감수성이다.

문화만 그러하랴,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 ‘불의’나 ‘비참’에 대해 분노하고 눈물 흘릴 수 있을까? 유배지 강진의 다산은 중풍으로 마비된 몸을 이끌고 학문에 전념하며, 한편으론 피를 토하듯 백성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유배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 대해 맑은 시정을 담은 시를 쓰고 산문들을 지어낸다.     

마찬가지로 다산의 논설문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치열한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문예적으로도 정연한 논리에 간결하고 힘찬 문장은 당당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명문들이다.(38, 39쪽)


정조 임금이 서거하기 직전,

무거운 책무로 분주했을 때, 다산은 이런 꿈을 꾸었더랬다.


나는 약간의 돈으로 배 한 척을 사련다. 배 안에는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대를 벌려놓고, 크고 작은 솥, 술잔과 쟁반 등 여러 가지 부엌살림을 갖추고, 방 한 간을 만들어 구들을 놓고 싶다. 집은 두 아이에게 맡기고, 늙은 처와 어린 아들, 어린 종 하나를 데리고 떠다니는 뱃집을 몰고 수종산과 초천 사이를 오가며, 오늘은 월계의 연못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석호의 굽이에서 낚시질하며 또 그다음 날에는 문암의 여울에서 고기잡이하련다. 바람 속에서 밥 먹고 물 위에서 자면서, 물결 가운데의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닌다. 그리고 때때로 짤막한 시가를 지어 기구한 여러 가지 정화를 나 홀로 풀어내기도 하는 것-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82, 83쪽)



강진의 귀양지에서 다산은 유배를 떠날 당시 돌쟁이였던 세 살 아들이 홍역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경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가진 것 없는 아비는 아들을 위해 인편에 소라껍데기 두 개를 보낸다.

멀리 떨어져서 자식들을 보살필 수 없는 다산은 위의  아들들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폐족'이 된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르치고 독서를 권한다.


반드시 먼저 경학으로 근본을 다지고 난 후에 앞 시대의 역사를 섭렵하여 그 정치적 득실과 세상이 태평하거나 어지러운 것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실용의 학문에 유념하여 옛사람들이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하는 것에 대해 적어놓은 서적을 즐겨보고, 항상 만민에게 은택을 베풀고 만물을 잘 육성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독서한 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 짙은 녹음이나 보슬비 내리는 좋은 경치를 만나면 갑자기 감흥이 일고 표연히 시상이 떠올라 저절로 읊어지고 저절로 이루어져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가의 살아있는 경지다.(173쪽)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좀 더 읽어보자.


내가 베풀지 않은 것을 남들이 먼저 베풀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의 오만한 근성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유념하여 평소 아무 일도 없을 때 공손하고 화목하며 신중하고 성실하게 행동하여 일가의 환심을 사도록 힘써라. 그리고 마음속에서 보답을 바라는 근성은 끊어버리고 남겨놓지 말아라. 훗날 너희에게 근심거리가 있는데도 저들이 보답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마음속에 절대로 한을 품지 말아라. 한결같이 내 마음으로 미루어 용서하며 ‘저 사람이 마침 그럴 사정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모자라는 것이리’라고 여기고, 절대 “내가 전에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라고 경박한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이 말이 한번 발설되기만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은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179,180쪽)


남들이 모르게 하려면 안 하는 것이 최고고, 남들이 못 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이 두 개의 문장을 평생 동안 외우고 다닌다면 위로는 하늘에 대하여 떳떳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전복시키는 최악이 모두 몰래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치열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7쪽)



풍파가 깊었던 생을 마친 날 아침,

그는 60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기념하는 “회혼 시”를 지었다.

그의 마지막 글귀가 되었다.


육십 년 세월은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으니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노랫소리 유난히도 좋으니

옛날의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 남았고

나뉘었다 다시 합함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

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자손에게 주노라        



아름다운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내는 삶도 좋겠지만.

매 순간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름답게 다듬어가는 것.

허우적허우적, 절망의 바다에서 몸부림칠 때

다산이 살아간 자취는,

최소한 우리에게 위기에서 붙들 수 있는 지푸라기는 되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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