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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pr 21. 2021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

활자로 만난 인물들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김은희 지음, 이담북스


머리말에서 저자는 '스탕달 신드롬'을 설명한다.

17세기 엘리자베타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속 아름다운 소녀와,

그 비극의 인물을 그려낸 또 다른 소녀가 겪은 권력에 의한 잔인한 폭력.

평면적인 한 컷의 그림이 담은 절절한 고통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가슴에 날아와 비수처럼 꽂히고.

관객들은 아찔해진다.


단 한 장의 미술품이 대하소설만큼이나 긴 이야기를 전해줄 때가 있다.

화가가 혼신의 힘을 다한 붓질 하나하나에 진실이 그대로 고여있다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그림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아픔을 토로하는 것이리라.

이 책은 19세기, 20세기 러시아 문학과 그림을 아우른다.

읽다 보면 당장 러시아로 떠나고 싶어 진다.

내가 대체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서정적인 그림들이다.

푸쉬킨, 고골 같은 작가들의 글과 러시아의 계절과 생활을 그린 담백한 풍경들을 소개한다.

그림은 아름다운데 잔잔하게 어려있는 슬픔 보이네.

러시아의 가을은 아주 짧다는군.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단.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가을이었다. 고향 마을을 떠날 때는 구름 한 점 없이 갠 청명하고 따뜻한 날씨였다. 농사일도 끝날 무렵이어서 탈곡장에는 큼직큼직한 곡식 가리가 높다랗게 쌓여 있고, 새떼가 모여들어 지저귀고, 이렇게 모든 것이 활기 있고 즐겁기만 했다.

그런데 페테르부르크는 그와 딴판으로 거리에 들어서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음산한 가을의 진눈깨비, 잔뜩 찌푸린 하늘, 질벅거리는 도로, 무엇이 못마땅한지 무뚝뚝하고 성난 것 같은 낯선 사람들의 얼굴!(48쪽)!



그리고 겨울은 이렇게 온단다.


화려하게 차려진 제사상에 올려진 제물처럼

자연은 파랗게 떨고 있었다.

구름을 몰고 온 북녘 바람이

불어오자 숲이 운다. 드디어

겨울 마녀가 찾아왔다

- A. 푸시킨 《예브게닌 오네긴》 (55쪽)



책에는 많은 그림들과 문학작품들이 소개되는데,

I.E. 레핀의 그림이 여러 점 있다.

그림 《기다리지 않았다 》에 대한 저자의 소개.


이 그림은 갑작스럽게 고향으로 귀환한 한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기 러시아는 격동의 시기로 의식 있는 인텔리들은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제 정치에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고, 가족을 떠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형기가 정해져서 떠나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고 대부분은 거기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 혁명가들 중 한 사람이 가족의 품으로, 고향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이 정지된 화면처럼 우리 앞에 묘사되고 있다.(218쪽)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짧게 자른 머리.

어두운 안색에 퀭한 눈.

허름한 외투를 걸친 초라한 인물에,

고급스럽고 안락한 방에서 단란하던 어머니와 아이들은 몹시 당황한 표정이다.

그동안 겪어냈던 고난과 시간은 자기 집을 너무나 낯선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레핀은 인물들이 미처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 찰나의 순간을 꿰뚫어 캔버스에 옮겨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네크라소프와 셰프첸코의 초상이 걸린 거실에서 아내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는 아이들과 함께 춥지도 덥지도 않은 늦여름 날의 햇볕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초상화들 옆에 걸려 있는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판화가 그와 같은 혁명가들의 결백함을 드러내 주는 것과 같다. (221쪽)



레핀의 유명한 그림 《볼가 강의 인부들》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신문에서 레핀의 볼가 강 인부들에 대해 읽자마자 너무 놀랐다. 주제 자체도 너무 끔찍하다. 우리는 왠지 인부들 하면 익히 알고 있는 민중에 대한 상류층의 사회적 부채 의식을 묘사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쁘게도, 내 공포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인부들, 진짜 인부들 밖에는 없었다.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림 속에서 관객을 향해 '보세요,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당신은 민중에게 얼마나 빚을 졌는지!'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오직 화가의 위대한 업적 덕분이다."


러시아 위대한 시인 N. 네크라소프의 시 《화려한 정문 앞에서의 단상들》 중 한 구절.


볼가에 가보라, 위대한 러시아의 강 위로

누구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는지?

이 신음소리를 우리는 노래라고 부른다-

인부들이 예인망을 끌고 가는 것을 ᆢㆍ(227쪽)



러시아는 오랫동안 누적된 부당함과 불의에 격렬하게 항거한 역사가 있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더랬지.

하지만 정의와 올바름을 짓밟은 억압은 더 잔인하고.

거친 발에 짓밟힌 정의는 비참하게 증발해버렸다.

철저하게 짓이겨진 고통스러운 집단기억 때문인가.

여전히 부패하고 부당한 권력에 무력한 현대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당장 바로잡지는 못하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힘에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기를.

그리고 지금의 부당함을 반드시 기록하기를.

화가들이 캔버스에 담담하게 기록한 아픔과 고난의 나날이,

지금 우리를 울리고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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