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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an 05. 2020

누룽지를 사랑함.

음식에 관한 단상 10

우리 어릴 때는 식구가 많아 커다란 솥에 하루 세 번 밥을 했다.

그러니 누룽지가 얼마나 많이 나왔겠나.

밥을 퍼내고 솥에 물을 부어, 펄펄 끓여,

뜨끈한 누룽지는 구수하고 부드러워서 밥맛이 없을 때도 목으로 술술 넘어갔다.

아버지는 한여름에도 꼭 따끈한 숭늉을 찾으셨다. 숭늉 한 사발로 식사를 마무리하시고는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따끈따끈한 누룽지를 밥솥 모양 그대로 들어 올려 설탕을 뿌린다.

요건 간식.

아이들은 쟁반 앞에 둘러앉아 경쟁적으로 누룽지를 뜯어먹는데,

쟁반이 비면 바닥에 떨어진 설탕까지 손가락에 묻혀 쪽쪽 빨아먹었다.


밥솥에서 꼬들꼬들 눌은 누룽지를 적당히 잘라 볕에다 바짝 말린다.

커다란 주머니에 넣어둔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몇 줌 꺼내 기름에 튀긴다.

쌀알이 부풀어 오른다.

건져서 설탕을 뿌린다.

치르르.

담담한 쌀맛과 고소한 기름 맛과 달콤한 설탕은 참으로 조화롭다.

쌓여있던 누룽지 튀김 더미는 눈 깜짝할 새 사라지는 마법을 일으켰다.


20대 한동안, 누룽지에 유난히 집착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나 때문에 누룽지가 꼬들꼬들하게 구워지도록 솥밥을 해야 했다.

오도독 오도독 누룽지를 씹어먹으면서.

아마 나는 불안정한 20대,

욕심과 현실의 간극에 빠져버릴 수도 있었던

헛갈리고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흔들흔들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조그만 솥에 하루 먹을 밥을 한다.

솥 바닥에 살짝 밥이 눌어붙으면 밥을 덜고 뜨거운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후루룩 따끈한 숭늉을 마시고 바닥에 고인 퉁퉁 불은 밥알까지 떠먹는다.

그래야 오늘도 밥을 잘 먹었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어머니와 홍성 여행을 두 번인가 갔었다.

텅 빈 느낌을 주는 홍주성을 좋아했다.

나무 이파리들이 무성해지던 이른 여름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기차 타고 홍성역에 내렸다.

시내를 내려다보는 역에서 홍주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느릿느릿 걸었다.

허기가 이는 시간.

시장을 지나가다가 상가 대부분은 아직 문이 닫혀 있는데,

정육점을 겸한 고깃집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문에 붙은 메뉴판에서 '육회'를 본 순간.

이심전심 모녀는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흠.

그때 먹은 시골풍 육회와 따듯한 누룽지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언제 또 갑시다, 여러 번 말은 했지만 다시 가보지 못했다.



그날.

홍주성의 늠름한 나무들은 푸른 이파리들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사각사각 흔들리는 나무에서 매미는 청량하게 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무 아래 제각각 자리를 잡으신 어르신들은 시원한 바람에 한가히 시간을 흘리고.

성 한편, 복원된 옛날 옥사는 100여 년 전쯤.

사방이 뚫린 감옥에서 추위에 떨며 억울하게 매질로 죽음에 내몰렸던 이들이 겪었던 지독한 고통을 내게 생생하게 전해주어,

나는 통증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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