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빌려드립니다.] 1-2편

2월 이야기- 2. 유리, 손을 내밀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밥 친구를 찾습니다.》


'하마 선장'님의 부엌을 빌리기로 했어요.

날짜는 2월 어느 날, 오후에서 저녁까지.


제가 부엌을 빌리고 싶었던 건요,

요새 심신이 많이 힘든, 생일이 가까운 분들과 함께 밥상을 차려먹고 싶어서에요.

저는 10년 넘게 서울에서 거의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학교 친구들도 있고 직장 동료들도 있기는 하지만.

속사정을 털어놓을 만한 사이는 아니에요.

그동안은 열심히만 하면 잘 될 거라고 믿으면서 자신을 몰아왔는데,

최면이 약발을 다했나 봐요.

많이 힘들어요.

저처럼 기운 빠지고 씁쓸한 기분으로 축 쳐져있는 분들,

우리 함께 음식 만들어 먹으면서 서로 위로해요.

지금 기분으로는 미역국에 반찬 두어 가지만 있어도 황홀할 것 같아요.


아, 저는 음식을 잘하지 못해요.

그냥 생존 요리.

부끄럽네요.

후다닥


아무 반응도 없으면 어쩌나,

제안을 해놓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데 혼자 허공에 손을 내민 듯 뻘쭘했다.

어색하고 서먹하면 어쩌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

실재하는 공간에서 함께 밥상을 차려내고,

게다가 진심까지 나눈다는 건 참 꿈같은 일이다.

얼른 그날이 지나가기를.

잘못된다면 내 마음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생일 밥상에 지원한 아홉 명은 단톡 방을 열었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

미세먼지로 덮인 하늘이, 콜록콜록, 너무해요.

날씨 얘기로 멋쩍음을 가린다.

'들꽃'님은 생일상을 제안하는 계기가 된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얘기한다.

"슬픔이 제 몸을 꽉 채웠어요.

지탱하기가 힘들어요."

뮤지션 '우왕좌왕' 님은 벽에 부딪친 자신의 진로를 토로하면서,

"어머니가 저 사는 거 와서 보시고 우시는데 얼마나 죄송하던지."

초조한 취준생은 교환학생, 연수, 인턴으로 소모한 지난 몇 년을 자책하고 후회한다.

제가 바보 같아요.

직장인이 입을 연다.

직장 다닌다고 다가 아니에요.

전 사수가 너무 싫어요.

어느 것 하나 싫지 않은 게 없어요.

거짓말, 떠넘기기, 말 바꾸기, 오지랖, 오버육바, 히스테리, 험담, 모략 등등 나쁜 재주는 다 갖춘 분이십니다.

매일매일 불행해요.

완치가 쉽지 않은 병을 앓는 참가자도 있다.

"몸도 힘든데 마음은 더 괴로워요.

환자가 되면서 저는 일순간에 쓸모없는 사람, 민폐덩어리가 되어버렸어요."

다들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어째요, 어쩌나요.

하루속히 건강해지시길 기도해요...


여행지 게스트하우스 같달까.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밥상 준비에 들어가자 활발했던 단톡 방은 급 잠잠해진다.

짧은 들숨, 날숨.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도 라면, 김치볶음밥?

변명을 하자면 요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요.

직접 밥해먹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어흑, 송구스러워라.

뒷전에 있던 '하마 선장'이 반 발짝 나선다.

인터넷 레시피만 따라 해도 돼요,

토닥토닥.

그래요?

용기가 솟은 초보들은 생각나는 메뉴를 이것저것 쏟아낸다.

다음 날.

흐엉, 같은 음식도 레시피가 조금씩 다르네요,

동영상을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쉽게 만들 수 있는 메뉴를 고릅시다.

우리가 먹을 만한 밥상을 차릴 수 있을까요?

음식이라는 게 융통성이 있는 거랍니다.

정성을 쏟으면 먹을 만큼은 돼요.

아 참, 재료 자르는 건 연습이 필요해요.

어느 정도 크기로 자를지, 눈으로 보는 거랑 실제로 잘라보면 다르거든요.


여러 얘기가 오간 끝에 환자와 채식 애호가를 배려하고,

부족한 실력 대신 의욕과 잠재력을 기대하며 다음과 같은 식단을 완성했다.


흰쌀밥, 잡곡밥.

고기 넣지 않은 미역국.

소고기 불고기.

동태전, 김치전, 감자전.

두부조림, 계란찜.

오이 무침, 봄동 겉절이.

맵지 않은 떡볶이.

후식으로는 부엌에 있다는 모과차. 생강차.

과일. 더하기 생일 떡.


흠, 의욕이 넘치십니다.

혹시 초보들의 음식이 실패할까, '하마 선장'은 미리 닭조림을 준비할 것이다.(비밀)

그러는 중 3월에 부엌을 빌리기로 한 분이

2월 생일 팀을 위해 지역 특산주 한 병을 미리 보내버리셨다.

다 큰 어른들인데 생일주 한 잔씩 나눠요.

이건 여러분께 보내는 내 응원이라구욧!



일할 분야를 나누고, 각자 역할을 배분한다.

(설거지 팀과 준비 팀으로 지원자가 쏠렸다.

떠밀려 조리 팀에 배정된 자취생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재료를 먼저 정리해서

그중 부엌에 남아있는 식재료를 확인한 뒤

장 볼 물품을 최종 작성할 것.

준비 팀은 시중 가격을 참고해서 비용을 추산한다. 9 등분한 액수를 각자 '들꽃'님 계좌로 입금.

(비용은 최소한으로 해요. 부담스러우면 안 되죠.)

준비 팀은 전날 미리 부엌을 답사하고.

당일 오후 3시에는 모두 모여 시작!

열흘 남았네.



분위기 달아오르고,

모두들 신남, 신남.

역시 여행이랑 잔치는 계획 짜고 준비할 때가 참맛!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엌을 빌려 드립니다.]1-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