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빌려 드립니다.]1- 3편

2월 이야기- 3. 밥상을 차려요^^

by 기차는 달려가고

예정된 세 시보다 일찍들 모여들었다.

수줍게 인사하며 서로의 닉네임을 소개하는데.

응? 낯설지 않아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오는 사람마다 앗, 어머 낫!

놀라는 인물이 있다.

'하마 선장'님, 상상했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요.

이건 완전 배신이야아!



앞치마를 두른 조리 팀에게 '하마 선장' 님은 당부한다.

음식은 각각 필요한 과정과 시간이 있어요.

내 마음 급하다고 자꾸 들볶으면 음식이 엇나가더라고요.

재료들이 서로 어울려 맛을 낼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주세요.


미역국을 먼저 끓일까요?

'하마 선장' 님은 채소와 버섯, 멸치와 마른 새우 같은 재료로 미리 육수를 끓여 두었다.

'겨울' 님은 물에 불린 미역을 먹기 좋게 썬다.

불에 달군 냄비에 들기름을 떨어뜨리고 곱게 다진 마늘과 미역, 간장을 넣어 볶는다.

육수를 붓고, 뚜껑을 닫고, 불을 조절하고.

자, 이제 국이 스스로 맛을 낼 수 있도록 한동안 내버려 둡시다.



'들꽃' 님은 동태 살에 술과 소금, 후춧가루를 살짝 뿌리고 밀가루를 묻혀 쟁반에 담는다.

'우왕좌왕' 님이 그 생선 살에 계란물을 입혀 달군 팬 위에 올린다.

능숙한 손놀림.

명절에 아버지랑 제가 전 담당이라 전은 좀 해요.


'레아 공주' 님은 불고기 양념, 봄동 겉절이 양념, 오이 무침 양념, 두부조림에 넣을 양념장을 도맡았다.

비슷한 재료가 들어가지만 맛은 다 다르게 나와야 한다.

레시피를 보면서 간장 세 스푼, 설탕 두 스푼, 파, 고춧가루, 마늘, 식초...

조심스레 양념을 조제하는 '레아 공주'님.

입맛을 기준으로 삼는 게 좋습니다.

수치는 참고할 만한 숫자일 뿐,

맛 자체는 아니랍니다.



두 사람이 달라붙어 방을 꾸민다.

식탁을 둘러 열 개의 의자를 배치하고,

색색가지 풍선에 바람을 불어, 통통, 천정으로 띄운다.

벽에는 마른 꽃 리스와 HAPPY BIRTHDAY.

한 뼘 더 위로, 오오, 왼쪽은 조금만 내려봐요!

들썩들썩.

뺨은 상기되고 목소리는 들뜬다.



'들꽃' 님은 김치를 잘게 썰면서 동태전이 익기를 기다리는 '우왕좌왕' 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거 열심히 하면 되겠거니, 했어요.

책 읽고 글 쓰기 좋아하니까

도서관에서 일하면 딱이네? 했죠.

잘게 썬 김치에 매운 고추 다진 것과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든다.

저는 선택이랄 게 없었어요.

10대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음악만 했거든요.

음악이 나의 전부였어요.



모양이 엉망이네요, 힝, 완전 똥망.

칼질은 시간과 연습이 필요해요.

나 혼자 먹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여러 분들 먹을 상에 올리려니 정말 창피해요.

절인 오이와 양파, 사과를 양념에 버무리는 '펭수 친구' 님에게 '하마 선장' 님은,

이상하죠, 달콤한 맛만으로는 안 돼요.

재료와 양념의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씁쓸한 맛이 잘 어우러질 때 아, 맛있구나, 하더라고요.



이렇게 모여서 음식을 하니까 정말 좋은데요,

한편으론 서글프네요.

음식 하려면 필요한 게 참 많다는 걸 실감했어요.

부엌이라는 공간, 조리 도구, 재료와 양념.

솜씨와 시간.

내게는 다 없는 것들이죠.

지금 제 처지에 요리는 사치에요.



완성된 음식이 하나, 둘 늘어간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라니!"

두 개의 밥솥에는 김이 오르고,

미역국은 잘 끓고 있다.

노릇노릇 구워진 동태전과 시큼한 김치전이 트레이에 척척 쌓인다.

불고기 준비, 끝났고.

두부는 양념에 조리기만 하면 됩니다.

떡볶이는?

계란찜도?

넵. 불에 올라가기만 기다립니다.

아, 감자 갈아야 하는데.

솜씨 없는 막손은 힘이나 써야지, 감자 다 주세요.



넉넉히 기름을 두른 팬에 강판에 간 감자를 한 국자 붓는다.

치이이익.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부모님이 귀촌하실 때 저는 서울에 남았어요.

음악 하는 선배들 자취집으로 들어갔죠.

계약직으로 이 도서관, 저 도서관 떠돌면서 2년 뒤를 예상할 수 없는 게 힘들어요.

늘 안절부절이죠.

학자금 대출도 남아 있고, 방값은 계속 올라요.

조심스럽게 감자전을 뒤집는다.

바삭바삭, 고소한 냄새.

음악은 내 감정을 표현하는 거고,

다른 사람들과 그 느낌을 나누는 거예요.

그런데 저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요.

거대한 벽이 내 앞을 막네요.

서울은 나를 밀어내요.

그렇다고 다른 곳에 내 자리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몸 담을 방 한 칸 아슬아슬하고,

내 재능과 열정을 쏟아낼 곳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고 서러워요.

다 익은 감자전을 꺼낸다.

점점 더 자주자주 비참해져요.

다 내던져버리고 싶다, 고 내 마음이 울부짖어요.



음식을 만드는 동안 설거지 거리가 계속 나온다.

수세미에 세제를 덜면서 말을 이어간다.

회사에서 종일 이상한 사람한테 시달리니까 나도 돌아버리나 봐요.

시도 때도 없이 이글이글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직장을 잡지 못하니까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해요.

그냥 잉,여.

흐르는 물에 냄비를 헹군다.

환자가 되면서 내가 가진 다른 가능성도 모두 묶여버렸어요.

<부실한 몸>이 저라는 존재를 한정지어요.

나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요?

저편의 화사한 세상을 부러워만 하면서 버석버석 사막 같은 마음으로 황량하게 살아갈까요?

분노가 나를 무너뜨릴까, 두려워요.



불고기를 익힌다.

양파와 버섯을 듬뿍 넣었다.

떡볶이도 시작하죠?

육수를 붓고, 양념을 넣고.

채소? 떡? 어묵?

O.K.

겉절이는 그냥 양념장을 뿌리기만 하면 되나요?

버무려야죠.

아!



'들꽃' 님은 엄마를 떠올린다.

삭막한 가슴에 분노만 가득 채웠던 사람.

아니 채우는 걸로 모자라 더, 더, 더, 키웠던 사람.

어린 딸을 자신의 분노로 활활 태울만큼 자신의 고통에만 치중했던 사람.

이제야 삶의 고달픔과 두려움에 짓눌린 허약한 존재로 당신을 이해하지만.

나는 도망갑니다.

가시 돋친 당신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 수가 없었답니다.



'들꽃' 님 할머니 얘기가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한여름 땡볕에서 살짝 불어준 바람 한 줄기에

"아이 좋아라,

누가 이렇게 고마운 바람을 보내주셨나."

하셨다는 그 부분이요.

우리 할머니는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불평 한 마디 안 하시고.

당신 인생에 비친 잠깐의 햇살을 진심으로 고마워하시는,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오갈 데 없던 작은 씨앗은 할머니의 곱고 보드라운 가슴에 안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답니다.

고운 들꽃을 피워낸 할머니,

당신의 사랑은 포근했어요.


그런데 그 착한 분은 지금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따스한 보살핌이 절실한데.

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있어요.

다른 환자들의 고함 소리, 심술궂음과 거친 손길에 시달리면서.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착하게 살았으면,

최소한 생의 마지막에는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냐고요?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바구니들과 납작한 초들을 놓았다.

수저는 금빛 리본으로 얌전히 묶고,

빨간색 매트에는 개인 접시와 유리컵.

찻잔과 술잔이 놓였다.

환호성. 박수. 휘파람.

아, 놀랍네요, 멋져요.

앞치마를 벗고 머리카락을 손질하며 식탁으로 모여든다.


차례차례 음식이 상에 놓이고.

'하마 선장' 님은 어제 만들어 둔 닭조림을 꺼낸다.

와, 우아, 함성을 지르며

하, 마, 선, 장, 님,

짱!

박수와 환호성.

원, 참.

쉽게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고통과 절망이 이들의 영혼까지 완벽하게 삼켜버린 것은 아니어서.

각박한 현실과 캄캄한 앞날에 힘겨워하다가도

약간의 축복과 햇살이 내비치면,

금세 활기를 되찾고 구김살 없이 기뻐할 수 있다.

맘껏 즐기세요.

이 순간을 흠뻑 누리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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