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빌려 드립니다.]1- 1편

2월 이야기-1. '하마 선장' 일을 벌이다!

by 기차는 달려가고


부엌을 빌려드립니다.


반년쯤 뒤에 헐릴 건물이에요.

그동안 작업실로 잘 썼는데요,

다음 달부터는 가끔만 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일을 시도해볼까, 합니다.


부엌 시설과 커다란 테이블이 있어요.

조리대와 개수대 구역에는 2~3명? 들어가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음식 만드는 건 골고루 평등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요.

테이블은 크고 의자는 많으니까 6명? 8명?

끼어 앉으면 더 많이 앉을 수도 있긴 해요.


부엌이 필요하신 가요?

음식을 만들 부엌이 필요하거나,

다른 사람들이랑 음식 만들어 함께 먹고 싶다-는 분 계신가요?

무료로 빌려 드립니다.

당장 쓸 양념은 있어요.

쌀, 밀가루 같은 식재료도 남아 있습니다.

있는 건 다 쓰셔도 되지만 떨어지면 제가 사드리진 못해요.

도구, 그릇 깨끗이 치우고 작업실 청소 말끔하게 해 놓는 조건입니다.


하루에 한 팀.

매일은 힘들고 제게 사연과 구체적인 사용 계획을 알려주시면

가급적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죠.


지하철에서 도보 10~15분 거리,

낡은 건물 2층입니다.

위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밤늦게까지는 곤란하고요.

술의 경우 식사하면서 가볍게 반주 정도는 괜찮지만 취하는 건 안 됩니다.

추상적인가요?

일정 조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죠.

친구들 또는 모르는 분들이라도 뜻이 비슷한 분들이 어울려

함께 음식 만들고 밥 한 끼 나눠먹는 경험은 즐겁지 않겠어요?



커뮤니티에 제안 글이 올라왔다.

가끔 글을 올렸던, 음식 관련 일을 한다는 회원이었다.

어라?

순식간에 댓글이 주르르 달렸다.

제안은 곧 다른 커뮤니티들로 퍼져 나갔다.

관심들이 많아 보였다.

글을 올렸던 '하마 선장'은 며칠 동안 수십 건의 진지한 쪽지와 셀 수 없이 많은 응원의 글을 받았다.



'비실비실 들꽃'입니다.

앞날이 안 보이는 계약직 떠돌이로 살아가려니 참 힘들군요.

10년 넘게 혼자 살았는데 지쳤는지 이젠 의욕이 없어요.

기운이 다 빠져서 지금을 지탱할 힘도 없고.

돌아갈 곳은 없고,

앞으로 나아갈 의욕은 물론 없고요.

피곤하고 쓸쓸해요.


곧 제 생일이에요.

생일이 다가온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끼리 밥 한 끼 같이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정말 오랜만이랍니다.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메뉴는 미역국.

닭백숙.

나물.

전 같은 거 떠올라요.

어릴 때 할머니가 차려주셨생일상이 그립습니다.




카페에 누가 글을 올렸다.

무심히 읽어버렸는데 몇 초 뒤 다른 글을 읽다 말고 다시 그 글로 눈이 갔다.

어두컴컴한 마음에 작은 촛불 하나 깜빡, 켜진 것 같았다.

할머니 집을 떠날 때,

할머니가 차려주셨던 때 이른 생일 상을 기억해냈다.

상 위에 뭐가 있었더라?



우리 이쁜 유리.

꽃 같은 유리.

가난하더라도, 외로울 때도

언제까지나 예쁘고 고운 유리여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우리 유리는 예쁘고 고운 사람.


할머니처럼?


에이그, 할미보다 고와야지.

할미보다 똑똑하고 이뻐야지.

할미가 맨날 맨날 기도할 거야.



할미는 틀렸어.

맨날 맨날 우리 유리가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어야 해.

사람 구실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걸?

돈만 있었으면 내가 약속한 대로 할머니 데리러 갈 수 있었을 텐데.

이게 뭐야...


병원에 다녀온 뒤 며칠째 분노와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견디기 힘들다.

속에서는 울화가 폭발하는데 몸에서는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표리 부동의 상태.

할머니,

유리는 지금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어요.



'하마 선장'은 '들꽃'님에게 답신을 보냈다.

먼저 '들꽃'님이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메뉴와 진행 방법을 논의하고,

장보기 같은 일정을 합의하기로 했다.

자리만 펼쳐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거 꽤 개입을 하게 되는걸?

흠, 처음이니까.

차차 자리 잡히면 수월해지겠지.

힘이 되면 좋겠네.

'비실비실'이라는 형용사가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들꽃'님이라고만 호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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