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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브런치 북 2021 응모

by 기차는 달려가고

<박태원 단편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편집, 문학과 지성사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가 1934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어느 하루,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 살고 있는 26세 청년 구보 씨의 행적을 따라간다.

구보 씨는 소설을 쓴다.

직업은 없다.

밤에 글을 쓰고 오전 늦게 일어나 밥 한 술 뜨면 집을 나선다.

두 발로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딱히 한 군데 갈 곳은 없는 신세.



그날도 여느 날처럼 집을 나섰다.

(아마도 다동 부근에 있었다는 작가의) 집을 나와 천변길을 따라서 광교 쪽으로 걷는다.

화신상회에서 화자의 시선은 아이를 데리고 나온 행복해 보이는 젊은 내외를 따라가네.

동대문 행 전차를 탄다.

음,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여인이 아닌가?

승객들 중에서 한 여인을 알아보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의 기억은 마음속에서 오락가락 부유하고.

전차는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 앞으로 해서 훈련원을 지난다.

문득 전차를 내려서는

약초정, (경성) 부청, 남대문, 경성역, 조선은행 앞을 걷고.

종로 네거리, 종로경찰서.

저녁은 대창옥에서 친구와 설렁탕으로.

이어서 황톳마루 네거리, 조선호텔, 경성우편국, 황금정, 낙원정으로 해서 오전 두 시 다시 돌아온 종로 네거리.


담담하게 구보 씨의 행적을 뒤쫓는 소설에 특별한 사건은 없다.

인물 간의 대립이나 갈등이랄 것도 없다.

그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친구와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면서 별달리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백화점이나 경성역에 갔다가 카페를 들락거리면서 또 거리를 걷는다.

그러는 동안 확실한 모양을 갖추지 않은 뜬구름 같은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포말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는데.

감정이 크게 고조된다거나 마음속에 격렬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다른 소설들에서 다루던 당시 식민지 조선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만연한 빈곤과 매춘, 노름과 알코올 중독, 병자들과 실업자들.

거칠게 싸움질을 하고 일자리를 구걸하고 하는 등의

어두운 조선 상황이,

슬쩍 지나치기는 하지만.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설에는 당시 조선인들,

특히 고학력 청춘들이 공유하는 감정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즉, 뚜렷이 갈 곳이 없고.

할 일을 갖지 못하고.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매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모르겠고.

대체 누구와 이 황혼을 지내야(128쪽)할지, 망연하며.

세상살이와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189쪽)하고.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107쪽)

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걸음걸이에 역시 피로가 있었다. 그들은 결코 위안받지 못한 슬픔을, 고달픔을 그대로 지닌 채, 그들이 잠시 잊었던 혹은 잊으려 노력하였던 그들의 집으로 그들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157쪽)

자정을 넘겨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서성이는 사람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단벌 옷에 한 켤레 양말과 한 벌 구두- 당장 몸에 걸친 것이 젖어 내일 입을 옷을 염려한다.


견디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단번에 이 어둠에서 탈출하기를 꿈꾸며 황금광에 매달리고.

십팔금 팔뚝시계 사원 팔십 전, ‘벰베르구’ 실로 짠 보이루 치마, 삼 원 육십 전,

(107쪽), 을 욕망하거나.

어색하게 다리를 빼어서는 살빛 비단 양말을 자랑하거나.

결혼 비용 삼천 원, 신혼여행은 동경으로, 관수동에 그들 부처를 위하여 개축된 집! 을 선망한다.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인 여행도 가고 싶지만

그림 속 이국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밖에.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결혼을 말했다가.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기집을 멕여 살립니까?"(90쪽)

아들의 퉁명스러운 대답만 들었다.



스물여섯에 벌써 결혼을 재촉받는다든지,

집을 나설 때 단장을 들고 나온다든지.

보통학교 시절 동급생의 모시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 오직 새로운 맥고모자(113쪽) 차림새에서 그만 독자들은 깔깔,

스물여섯이 아니라 마흔여섯은 된 거 같은데?

90년 전의 경성 풍경에 꺆! 비명이라도, 지르겠지만.


대문을 열고 나가는 아들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을 귓등으로 흘린다거나.

(그러고는 미안한 마음)

부모님께 표현은 안 해도 나이 되도록 사회에 자리잡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송구스럽고.

얼굴이라도 아는 이성분들을 마음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초대하신다거나.

카페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어디론가 다른 세상으로 휙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무엇보다 금시계 차고 거들먹거리는 전당포집 둘째 아들이 어여쁜 여인과 월미도로 놀러 간다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자니,

울컥! (어여쁜 여인이라는 대목에서!) 하다니,

스물여섯이 맞다!

후드티에 기모 바지, 조던을 신는다면,

당장 지금 이 시대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청년들이다.

소설이 쓰인 지 한 세기가 되지 않아 우리는,

엄청난 고난과 굴곡을 겪으면서도 당시의 빈곤한 식민지에서 지금은 선진국에 진입할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비교가 무의미할 만큼 생활 여건이나 삶의 질과 양 모두,

엄청나게 좋아졌는데.

사는 일은 여전히 고달프고 막막하다.


가고 싶은 저곳까지 빤히 보이는데,

막상 가려하면 벽이 높고 너무나 아득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을 도저히 못 찾는다.

불만이 팽배하고.

일자리, 집, 사랑, 결혼과 육아...

나의 꿈, 나의 행복!

이상과 현실의 거리 앞에서 청춘들은 좌절과 분노에 익숙하다.



어쩌면 희망은,

사실 그렇게 명랑하고 들뜨고 환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희망이란 확실한 약속이나 보장된 꽃길이 아니다.

앞에서 읽어왔듯이.


시인은 상처투성이,

고달프고 초라한 아픔 속에서.

순정과 순수의 사랑 한 조각을 찾아내고.

늙고 지친 산파는 모쪼록 내게 이 고난을 견딜 힘을 주십사, 기도하면서 쇠잔한 몸과 상처받은 마음을 묵묵히 견딘다.

죽어가는 소년이 해준 축복의 말과

가난한 노파가 베푼 친절을 괴로움보다 더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어린 올리버는 무서운 사건이 기다리는 런던을 향해 타박타박 걸어갔고.

우직한 청년 샹즈의 몰락을 마음 아파하는 차오 선생은,

비참하고 괴로움이 흘러넘치는 슬픈 현실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며 가엾은 샹즈를 써 내려갔겠지.

마음이 다친 예민한 소년은 일기를 쓰고 책을 읽으며 초라한 거리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었고.

오직 자신들의 호화로움에만 관심 있는 귀족들과,

죽음으로 쓰러질 때까지 고된 노동과 비참한 환경에서 처절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농노의 현실에서 이동 전람파 화가들은,

세상에 진실이 전해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려냈으며.

핍박받는 가운데 삶과 고통의 의미를 찾아 도스토예프스키를 파고들었던 치프킨이 있었다.


당장 생활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막막한 처지에서 스물여섯 청년 구보 씨는,

가진 것 없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경성의 거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1930년대,

식민지 조선,

경성의 모습을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더듬어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나의 두 발을 내딛는 것.

그것이 희망이 아닐까.

고난을 헤쳐 나온 경험은 자신감이 되고.

그렇게 얻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단단한 힘은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뭐,

절대 반길 수는 없더라만.

꼭 시련과 고난이 내게 오셔야겠다면.

굳이 겁부터 먹는다거나 도망칠 일은 아니더라.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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