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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an 23. 2022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활자로 만난 인물들

익명의 여성 지음, 염정용 옮김, 마티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은 30대 초반의 독일 여성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베를린에서 겪은 일을 가감 없이 쓴 기록이다.

1954년 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다가 2003년에 처음으로 독일에서 출판된 것 같다.


300쪽이 넘는 분량에,

담담하게 기록했으나 상당히 무겁고 암담한 내용이라...

읽는 중에 몇 번이고 손에서 내려놓았었고,

이 글을 쓰면서도 내용을 어디까지 정리할지 갈피 잡기가 쉽지 않.



1945년 4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저자는 노트 세 권 분량의 일기를 썼다. 1945년 7월, 그녀는 가까운 지인에게 보이기 위해 이 글들을 타자기로 작성했다. 타이핑을 하며 중요한 단어들을 문장으로 바꿨고, 암시적이었던 부분들을 명확히 정리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내용을 추가했다. 무질서한 낱장의 메모지들이 얼추 제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해서 잿빛 군수용 타자 용지 121쪽 분량의 글이 완성되었다. 

(7쪽, 독일어판 출판사 서문)

 

저자가 기록을 시작하던 당시 독일은 수 년동안 전쟁을 해오고 있었다.

남자들은 전장으로 떠났고 도시에 남은 사람들은 끊길 듯 말 듯한 배급에 의지해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굶주리며 숨어 지내고 있었다.

폭격에서 겨우 가방 하나를 챙겨,

징집된 옛 동료가 혼자 살았 구멍 숭숭 뚫린  집에 몸을 의탁한 혈혈단신 저자는,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포신들에 둘러싸여(11쪽) 지내는 중이다.

동네 주민들은 무너진 건물 지하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밤을 지내고.

낮에는 배급 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수도와 가스가 거의 끊긴 자기 으로 올라가 지난밤 포탄으로 엉망진창인 잔해를 치운다.


1945년 4월 22일, 일요일 새벽 1시.


나는 건물 출입문에 서서 지나가는 군인 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운 없이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많은 이가 다리를 절었다. 말없이, 각자, 보조도 맞추지 않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까칠한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은 초췌했다. 등에는 무거운 행장을 지고 있었다.

....

너무나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뿐, 어떤 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패잔병이자 포로처럼 보였다. 그들은 보도에 선 우리를 무감각하게 멍한 눈으로 보고 지나쳤다.(31쪽)


군대는 이미 패잔병이고 국민들은 죽어가지만 권력자는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배고픔과 불안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버틸 뿐이다.


누구도 우리를 걱정해주지 않는다. 별안간 국민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의 오랜 유대는 세 건물 이상 떨어져 지내는 한 모두 끊겼다. 우리는 동굴에서 지내는 씨족 무리다, 원시시대처럼. 행동의 반경은 백 걸음이 채 되지 않는다. (35쪽)


빈집들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고.

여자들이 지금은 양동이나 철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포격 한복판에 서(40쪽)서는,

질 낮은 배급품이라도 받겠다고 몇 시간씩 줄 서 있거나 먹을 것을 두고 몸싸움을 한다.


전쟁은 일상을 앗아갔다.

자고,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지극히 평범한 삶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오직 당장 살아남을 지에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다.

배고프고 암담한 현실에서 저자는,


세련되고 충실한 연애는 규칙적이고 풍족한 식사가 전제되어야 한다.(13쪽)

-고 말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와 게르트는 이미 오래전에 결혼했을 것이다. 게르트가 소집 명령을 받는 순간, 얘기가 끝났고 그가 결혼을 포기했다. “아이를 낳아 전쟁고아로 만들려고?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바로 전쟁고아야. 그게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아.”(95쪽)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향해 진격해온 러시아 군이 베를린으로 들어온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는 주민들이 숨어있었고.

러시아 군은 거리에 막사를 차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물건들이 약탈당하고.

거의 모든 여자들은 군인무리들한테 겁탈당한다.

전쟁 당시 러시아 군만 그랬던 건 아니다.

여자들은 독일의 군대 또한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에서 마찬가지였음을 짐작하고.

(유럽 곳곳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전쟁 동안 겁탈과 능욕을 당했다.)


러시아 군인들은 겁에 질린 여자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들은,

짐승 같은 러시아 군인들 또한 자신들처럼 영문도 모른 채 전쟁으로 고통받는 희생자라는 이해를 얻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쑥대밭이 된 고향을 떠나 전쟁터에서 몇 년.

독일군에게 처자를 잃고 고단하고 외로웠던 군인들은 일단 날뛰는 생식기를 달래고 나니,

가정의 따스함이 그리워졌 아닐까?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보살핌을 떠올리면서 더럽혀진 지금의 자신에게 과분한 것이었다고 자책하고.

이런 꼴을 겪으면서 더 살아야 하나,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소망하고.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도시를 조금씩 맨손으로 치우면서.

도로 옆 빈 땅에 채소를 가꾸고.

남은 식량으로 최대한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내면서.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서는 죽지 않겠다, 는 자존감으로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었겠지.



독일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난다.

러시아 군은 지역을 떠났다.

2주일이 채 안 되는 기간, 여자들은 평생 회복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달겨드는 군인을 피해 4층에서 창밖으로 몸을 날린 여자도 있었다.

그 와중에 겁탈을 피한 운 좋은 여자들이 있었다.


막무가내 문을 밀고 들어오던 러시아 군인들은 아기 침대에서 쌔근쌔근 잠든 아가들을 본다.

얼굴에 웃음이 번지면서 여자들에게 덕담을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뒤에는 아기들 주라며 초콜릿을 가져다주었다고.


분장을 배웠던 여자는 흉측한 노파로 변신했다.

너는 꺼져!- 하며 밀어버리더란다.

바로 곁에 젊은 아가씨들이 있었기에 피할 수 있었을 뿐인걸.


5층에 숨어 살던 부인도 무사할 수 있었다.

마당이 있는 단층집에 살았던 러시아 군인들이라 계단이 많은 5층까지는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뒤늦게 알았다.


독일 주택 특유의 다락에 숨어 지내던 처자도 이글이글한 러시아 군인들의 시야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돌보아 줄 부모가 있었으니 가능했다.


찢긴 몸의 통증과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자신에 자학하던 저자는,

영혼을 비참한 육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오욕에 갈기갈기 찢긴 자신을 벗어버려야 그나마 내면이라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겠지.



다음은 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 저자의 통찰이다.


요즘 들어 남자에 대한 나의 감정, 아니 모든 여자의 감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남자들이 안됐고, 너무나 비참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나약한 성(性)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 전쟁에서는 우리 여자들도 그 특권에 가담한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 (58쪽)


실제로 전쟁 이후 어이없이 죽어간 남자들을 대신해 전쟁 복구에 여자들이 투입되면서 여권이 향상되었다.

책임과 권리는 상관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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