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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Jan 14. 2022

W. G.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

활자로 만난 인물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지은이가 취리히에서 1997년 늦가을에 진행했던 강연의 내용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이 책은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글은 이차대전 막바지, 독일에 쏟아진 무지막지하고 무차별한 융단폭격과 이에 대한 독일인들의 집단적인 침묵을 다루고 있고.

뒤의 글은 전후, 나치시대 문학인의 교묘한 자기 방어를 다룬다.


우리나라에서 일제강점기 적극적인 친일행위가 청산되지 못한 것과 달리

독일에서는 나치 동조자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법적 조치를 실행하고 있는데.

불의의 시기에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시류에 편승했으면서도,

문학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왜곡하고 치장하는 거짓을 저자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느라고 문학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은 혹시 아닐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3제국 시기에 독일에 남아 있던 대다수 문인들에게 1945년 이후 자기 이해를 재정의하는 일은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 상황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긴박한 일이었다.(9쪽)


이 글에서는 책의 첫 번째 글만 다룬다.



폭격은 이러했다.


 오늘날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연합군의 전략 폭격 조사나 독일 통계청의 조사, 여타 공식 출처에서 영국 공군이 독자적으로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다는 것, 한 차례 또는 그 이상 수차례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다는 것, 독일 민간인 60만 명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는 것, 주택 350만 채가 파괴되었고, 종전 무렵에는 7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았으며, 쾰른에선 주민 한 명당 31.4세제곱미터의 건물 잔해가 쏟아지고, 드레스덴에선 주민 한 명당 42.8세제곱미터의 건물 잔해가 쏟아졌다는 것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이러한 것들이 정녕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파괴 행위는 새로 건설된 국가 연감에 일반본으로 얼버무려 기록되었을 뿐 집단의식에 전혀 상흔을 남기지 않은 양 치부되었고, 당사자의 회고에서도 거의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그간 독일의 내적 상태에 관해 진전된 논의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확인해주었듯이 그 어떤 것도 공적으로 의미 있는 기호가 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일, 매월, 매년 이러한 공습에 노출되었으며, 전쟁 후에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모든 긍정적인 삶의 감각을 억누르는(그래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지만) 공습의 실질적인 결과에 맞닥뜨려야 했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이는 대단히 역설적인 사태이다. (13-14쪽)


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어렴풋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영국이 독일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폭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만,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일본에 두 차례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실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독일 정부 차원에서 나치 청산에는 열심이지만 자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무지막지한 영국의 포격을 상기하는 적극적인 행위는 듣지 못했다.

일본 국민들이 한없는 자기 연민으로 히로시마 원폭의 고통을 설명하는 건 해마다 보지만 말이다.


저자는 개인이든, 정부나 학문적인 차원이든 독일인들이 이 문제에 관해 아예 입을 다물고 기억의 저편으로 차단시키는 이유를 추정하는데.


그동안 이미 전설이 되어버렸고 또 어떤 점에서는 실제로 경탄할 만한 독일의 재건은 적국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뒤에 실시된 제2의 과거 청산작업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노동 실적을 요구하고 얼굴 없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냄으로써 처음부터 어떠한 회고도 용인하지 않았으며 국민 모두에게 미래 지향적일 것을 강권했고, 그들이 겪었던 일에 대한 완전한 침묵을 강요했다. (18쪽)



나의 의견을 더하자면,

독일이 연합국의 폭격을 따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치의 패륜이 언급될 수밖에 없고.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는 독일인들이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에 아예 입을 다물자는 합의가 은연중에 계산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북해를 날아온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린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도시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다.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불길을 피해 달아나지만 폭풍 같은 화염은 건물들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불태운다.


무제한 공중폭격 계획은 1940년 영국 왕립 공군 부대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여 1942년 2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력과 국방비를 투입하여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어떻게 전략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가능성과 당위성의 문제는, 내가 알기로는 1945년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독일에서 한 번도 공론화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용소에서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하고 죽도록 착취했던 민족이, 승전국에게 자국 도시의 파괴를 명령한 군사정치적인 논리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라고 요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그 이유일지 모른다. 게다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함부르크 몰락에 대한 한스 에레히 노사크의 묘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그 명백한 광기 앞에 무기력함을 느끼고 쓰라린 분노를 품었음에도, 그 거대한 염을 한층 높은 심급이 가하는 보복 행위로는 아니더라도, 정당한 징벌로 여겼을 것이란 사실도 배제할 수 없다. (26쪽)



여러 해에 걸쳐,

전략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막대한 민간인의 피해만 야기한 이 무자비한 융단폭격에,

영국 내에서 격렬한 논쟁과 반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효과 없는 이 폭격 전술이 지속된 데에 저자는 군수산업이나 영국의 입장 같은 측면을 지적한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명령만 내리는 사람이야 무슨 피해를 보겠는가.

자국의 청년들이 죽어나가고 적국의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숯더미가 되는 순간에도,

폭격기를 띄워 보낸 명령자는 푸짐한 식사를 즐겼겠지.

자국 국민들이 이토록 비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버티고 버틴 나치 권력이란, 참.


몇 시간 만에 한 도시의 모든 건물과 나무, 주민과 가축, 살림살이, 집기, 갖가지 시설물이 모조리 타버린 도시 전체의 파멸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해낸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의 작동 력은 어쩔 수 없이 과부하가 걸리고 마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 증언은 제한된 가치만 있을 뿐이며, 총괄적이고도 정교한 시선 아래 그 내용을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943년 한여름, 무더위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그 도시를 가능한 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7월 28일 밤 새벽 1시에 개시된 공격에서 1만 톤의 파쇄 폭탄과 화염 폭탄이 엘베 강 동쪽의 거주 밀집지역, 하머브룩, 함노르트와 함쥐트, 빌베르더 아우스슐라그를 비롯하여 장트게오르크, 아일베크, 바름베크, 반즈베크 구역을 포함한 지역에 투하되었다. 이미 검증된 수법에 따라 먼저 4,000파운드의 폭탄이 창과 문을 일제히 박살하여 문틀에서 떼어냈으며, 가벼운 소이탄이 지붕에 불을 지르는 동안, 15킬로그램까지 나가는 화염 폭탄이 최저 지하층까지 뚫고 들어갔다. 몇 분 만에 약 20제곱킬로미터 크기의 공격 지대 사방에서 거대한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첫 폭탄이 투하된 지 십오 분이 지나자 불길은 이미 눈앞의 온 하늘을 화염으로 뒤덮을 만큼 그렇게 삽시간에 번졌다. 불은 그런 막강한 힘으로 2,000미터 상공까지 치솟아올라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였으며, 엄청난 강도의 돌풍을 일으켰고 마치 한꺼번에 모든 음전(音栓)이 다 당겨진 육중한 오르간처럼 우르렁거렸다. 불은 그렇게 세 시간 내내 타올랐다. 절정에 이른 화염 폭풍은 박공과 지붕을 날려버렸고 대들보며 벽보판을 공중에 소용돌이치게 했으며 나무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렸고 인간들을 살아 있는 횃불처럼 들고 전진했다. 무너져내리는 건물 전면을 따라, 집채 같은 불길이 솟아올라 마치 홍수처럼 시속 150킬로미터의 속도로 거리를 곧장 굴러가더니 드넓은 광장 위에서 기이한 리듬으로 뱅글뱅글 돌며 불의 왈츠를 추었다.

.....

 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어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 붙어 있었다. (42-45쪽)



벌어진 일에 비해서는 남아있는 자료도 희소하고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거부한다.

문학이 문제를 제기해야겠지만,

그것이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되겠지만.

문학자들은 오염된 나치시대에 물들었던 자신을 변호하느라 급급하다.

저자는 이러한 참상을 불러온 독일인들의 책임을 지적한다.

일시적으로라도 동의했던 책임,

내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했던 책임,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지 않은 책임이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글을 마친다.


이 도취적인 파괴의 꿈은 실제 폭파전의 선구적인 작업들이-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에서- 독일인들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우리가 쾰른과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서 겪었던 화염의 밤들을 생각할 때면 다음의 사실도 떠올려야 한다. 1942년 8월, 독일 육군 제6군의 선봉이 일찌감치 볼가 강에 도착하여 그중 적지 않은 이가 전쟁이 끝나면 고요한 돈  기슭에 버찌 나무 밭을 일구며 정착하는 단꿈을 꾸고 있었을 때, 훗날의 드레스덴처럼 당시 난민들의 물결로 넘쳐나던 스탈린그라드 시는 1,200대의 전투기로 폭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공중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볼가 강 건너편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들 사이에서는 그 공습으로 4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에 환희의 감정이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143쪽)



다음에는 이 폭격의 시간과 뒤이어 진주한 러시아군의 몇 달을 겪어내야 했던 여성의 기록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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