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목포 행- 목포의 인물들

마음에 남은 풍경들

by 기차는 달려가고

어디나 그렇지만,

목포가 목포 출신 인물들을 참 사랑하는구나, 싶더라.


절망적이었던 일제강점기에 목포를 노래했던 가수 이난영에게 그 이름을 붙인 공원을 삼학도에 조성했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도착한 고하도 전망대에도 이난영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소설가 박화성,

우리나라 연극의 대부 차범석,

나도 참 많이 읽었던 문학평론가 김현을 소개하고 있었지.

휴관이라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러 박물관, 전시관들이 있었고 그중에 목포문학관도 있더군.


무엇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성장한 곳이고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 되어준 곳이어서.

목포에는 대통령이 살았던 곳들이 남아있고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삼학도에 있는 노벨평화상 기념관은 시티투어로 가서 문화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목포진 바로 옆에 있는, 섬소년이 목포에 와서 머물렀던 집에는 혼자 들렀다.


감옥에 갇히고, 살해 위험에 처하고, 나라에서 쫓겨나고, 집안에 감금되어 수십 년.

기념관에는 감옥의 독방에 갇혀서 공부하고 글 쓰는 그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조차 제한되어서 종이 한 장에 되도록 많은 내용을 담으려 정말 "깨알"만 한 글씨로 써 보낸 편지.

보통의 필체와 비교해보라.

그가, 그의 가족이 겪었던 피눈물 나는 시절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다.


목포진은 나라가 무너져가던 조선말에 거의 폐지 상태가 아니었나 한다.

일제강점기, 바로 옆에서 일본인들이 활개를 칠 때.

섬에 살던 소년은 배우겠다는 일념,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목포에 도착한다.

그때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가파른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목포진 옆 작은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한 서너 평이나 되나, 아래층 위층의 좁고 낮은 오두막.

지금이야 말끔하게 손질해서 손님을 맞지만,

바로 옆에 있는 집들을 보면 그 시절 생활을 알 수 있겠지?

아주 작은 집들이 틈 없이 붙어있는 다세대주택이 아니었나, 짐작되는 곳.



일본영사관 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는데.

전쟁 말기에 인명과 물자와 함께 폭격에서 버티려 만든,

일본인들을 위한 이 시설을 만드는 노역은 조선인들이 했다.

곡괭이와 삽, 무엇보다 배곯은 조선인들의 목숨으로 파낸 방공호.

제목 사진에 있는 조선인들 모형은 피골이 상접했을 실상과 너무 다른 모습이라...


온 나라가 으쌰 으쌰 길을 낸다, 공장을 짓는다, 수출을 한다,

들썩거리던 박정희 시절.

호남 땅 너른 평야는 대지주가 따로 있고.

보통 사람들은 농사 지을 땅도, 취직할 일자리도 없어서,

젊은 사람들은 서울로, 부산으로, 경상도의 공단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식모 언니들,

공돌이, 공순이라 하대 받던.

더해서 출신 지역으로 차별받던 이른바 '전라도 사람들'.

그때 잘 생기고 흥 많은 가수, 목포 출신 남진의 노래가 이들에게 위안이 되어주었겠지.


다시 그런 잔인한 시대는 오지 말아야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목포 행- 시티투어 2, 지금이 오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