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Nov 16. 2022

모순되는 마음

끄적끄적

전에도 썼다시피 사람들은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말로 심정을 감추거나 상대방을 속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파악하려 할 때,

말을 듣기는 하지만 동시에 표정과 말하는 사람의 지난 이력,

실제 하는 행동을 심히 관찰했었다.


피곤하지.

피곤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누군가의 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음, 결론이 어째...

하여간 나 자신도 사실과 다른 말을 종종 하지 않는가?



사람의 속마음에 관해 말하자면 끝이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한 가지 경우만 논해보자.


어떤 이가 병에 걸렸다.

먼저 떠들 것은 없지만 누물으우리 집에서는 스스럼없이 병명이나 병의 진행  상황을 얘기하는데,

걸린 사실비밀로 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더라.

굳이 숨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병이 걸린 것도, 치료를 받는 것도 쉬쉬하면서 다 나으면 말한다고.

어쩌면 자신의 병을 믿고 싶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지.


그런 지인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물었다.

모른 척하자니 도리가 아니고.

본인이 니라는데, 병문안 갈 수도 없어 난처하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내 의견으로는 환자 본인도 갈팡질팡 하는 마음일 것 같다.

병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나를 죽을 사람 취급할까 봐 싫다,

한 자존심과 함께.


나의 아픔을 위로받고 싶다,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는지 나의 분노에 공감해주면 좋겠다!, 하는 양가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병문안을 도 환자 의견을 묵살한다 화내고.

안 오면 안 온다고

아니, 지가 나한테 어쩜 그래!, 서운해하면서

주변에서 오냐오냐, 받아주는 환자의 특권을 맘껏 휘두르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어렵더라도 남들에게는 티 내지 않으면서 

"나의 어려움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라!" 

하는 자존심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자신을 격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한편에는 있을 수 있다.


예전에 우리 서른 살 전후, 친구들이 결혼해서 새댁 무렵에.

모두에게서 시집 잘 갔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과.

사실 부부 사이도, 시댁과의 관계도 모두 서툴고 낯설어서 때로 분하고 속상하고 억울한 낱낱을 토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여.

가끔은 스스로 털어놓고는 곧 후회하며,

"그런 말을 했다 해서 내가 불행한 거 절대 아니야!"

라는 식으로 이미 깨진 항아리 붙들고 전전긍긍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면은 듣지 않는 게 상책이다-라는 걸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딴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걸 열심히 들어만 줬을 뿐이라도.

마치 들은 사람이 말한 사람의 큰 허물이라도 알게 된 양,

비밀을 온갖 데 떠벌이고 다닐까, 걱정되어

들어준 친구에게 경계심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어 그랬을 수 있겠지.



사람이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부족하고 모자라고 일관성 없는 부분을 어느 정도는 서로 양해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해 놓고는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짓을 당하면 분하고 억울하다.


하물며 요즘 시국처럼 악랄하고 잔인하게.

더럽고 냄새나는 똥을 싸놓고는,

비단으로 포장해주지 않는다고

칼춤을 추고 나니를 휘둘러대면.


으, 으, 으, 싫어.

경멸, 환멸이다.

그걸 감싸는 사람들은 참 비위도 좋다.

유유상종.






매거진의 이전글 선불, 후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