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03. 2022

유배라는 고독

책을 기록함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이화북스



TV도 없고, 관람 생활에서 멀어진 지 오래라 월드컵 경기를 보지는 않지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로도 충분히 경기 진행은 알 수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기뻐하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에 힘을 얻는다고,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국뽕 치사량이 넘친다고,

잘 싸운 우리 선수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올해 들어 사회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일들만 있어서 웃음 지을 일이 없었는데,

모처럼 마음 놓고 활짝 웃을 수 있으니 선수들이 정말 고맙다.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프랑스혁명 기에서 왕정복고 시기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기를 정치권에서 교활하게 생존해 낸,

아주 야비한 인간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얇은 책.

몇 쪽 넘겨보다가 자리 잡고 앉아서 다 읽었다.

해가 뉘엇뉘었지던, 어두워가는 캠퍼스를 빠져나오면서 기분이 어찌나 가라앉던지.

어른들의 비열한 세계를 살짝 엿본 느낌이었다.


40여 년 전에는 얇게, 아마 간추려져서 번역되었을 책을,

이번에는 원본 그대로 번역된 책으로 다시 읽었다.

기분이 안 좋아서 독서 진행이 더디다.

그래도 다음의 구절은 추천하고 싶다.



  ... 유배된 자는 강요된 고독을 어렵사리 견뎌 내며 송두리째 무너졌던 영혼의 힘을 전혀 다른 새 여건에서 끌어모으게 된다고 말이다. 예술가들은... 본인의 뜻에 어긋나더라도 휴지기를 가져야 자연의 이치에 맞다. 바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삶을 두루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후퇴를 해 본 사람만이 돌격할 때 힘을 제대로 발휘한다.


   특히 천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한동안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멀리 추방되어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야만 참된 과업의 폭과 높이를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은 모두 유배를 거쳐서 생겨났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 모세와 예수, 무함마드와 붓다, 모두 중대한 가르침을 전하기에 앞서 침묵의 광야로 가야 했고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지내야 했다. 밀튼은 실명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을 갔고 세르반테스는 감옥에 갇혔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지냈으며 단테는 망명을 했고 니체는 살이 에이는 듯 추운 엔가딘 지역을 거주지로 택했다. 물론 이들은 맨 정신으로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이들의 수호신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끔 은밀히 조율했다.

    예술에 비하면 낮고 속된 세계인 정치계에서도 유배는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 정치 지도자는 한동안 현역에서 물러나 있으면 새롭고 신선한 시각을 가지게 되고 정치계의 힘 싸움을 더 잘 검토하고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정치인에게는 경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것만큼 좋은 일은 또 없다. 학식과 권력을 갖춘 황제가 항상 높은 위치에서만 세계를 내려다본다고 치자. 그는 굽실대는 백성이 황송해하며 모든 명령을 받들려고 하는 위험스러운 상황만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스스로 측량의 기준을 정하는 자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를 잴 수 없게 된다. 만사가 바라는 대로, 계획된 대로 계속 이루어진다면 예술가와 장군과 권력자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실패를 맛보고 나서야 예술가는 작품과 자신이 진정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배운다. 패배를 하고 나서야 장군은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를 깨닫는다. 군주의 총애를 잃고 나서야 정치 지도자는 제대로 정치를 조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항상 부를 누리다 보면 유약해지고 항상 갈채를 받다 보면 둔감해지는 반면 의미 없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일상이 멈추면 새삼 긴장하게 되면서 탄력을 얻고 창조력을 발휘한다. 불행을 겪은 사람만이 세상의 현실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다. 유배 생활이란 냉혹한 과정이지만 참된 학습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거치면 나약한 자는 의지를 새로이 다지고 우유부단한 자는 단호해지며 가혹한 자는 더 가혹해진다. 늘 그렇듯이 진정으로 강한 자가 유배를 당하면 그의 힘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날 뿐이다.

(130, 131, 132쪽)



위대한 인물에게만 고난이라는 축복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지금 불운의 터널에 갇힌 이들 모두 좌절하지 말고,

그저 행운의 시기만 기다리면서 시들어가지 말고.

나에게 도약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나'라는 사람의 폭과 깊이를 키울 기회가 왔다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맞아들이면 좋겠다.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불운은 닥치고.

악당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고난을 극복하면서 악한 쪽으로 더 발전한다.

그들만 살아남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과학을 구경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