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전쟁과 가난을 상기시켰던 밀가루.
빵이나 국수, 그런 결과물에나 익숙하지 요즘 생활에서 직접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은 드물지 몰라.
하지만 밀가루의 쓰임은 다양하고.
가격이 올랐다지만 곡식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박력분, 강력분 같은 구분에 밀가루 종류도 여러 가지지만,
나는 그냥 흔한 통밀가루를 고른다.
두루두루 쓰기에 무난하다.
옛날 할머니들, 밀가루에 콩가루 섞어서 조물조물 반죽하여 밀대로 밀다보면,
한없이 크고 넓게 늘어나던 반죽 덩어리.
채 썰어 야들야들한 국수를 멸치육수에 애호박 송송 썰어 한 솥 끓여서는,
온 가족 둘러앉아 후후 불며 먹으면 얼마나 맛나든지.
이제 시대가 바뀌어 한나절 내내
할머니가 만드시던 칼국수는 사 먹는 음식이 되었다면.
그저 한 손에 잡히게 작은 반죽을 만들어서는,
펄펄 끓는 육수에 뚝뚝 떼어 넣는 수제비는 집에서 끓일 수 있다.
멸치육수에 넣어도 맛있고,
고기 넣고 끓여도 맛있다.
시큼한 김칫국이 남았다면 김치수제비로 먹어도 맛있고,
생선찌개에 똑똑 떨어트려 한소끔 더 끓이면 빨간 찌개 속 수제비만 찾게 될걸.
효모 넣은 밀가루 반죽을 밀어 가운데에 설탕을 넣으면 호떡이 되고.
동그랗게 말아 증기에 쪄내면 찐빵이 된다.
찐빵 안에 팥소를 넣거나,
여러 채소를 채워 넣으면 영양가도, 맛도 높아지지.
틀이 있다면 팥 앙금을 넣은 붕어빵을 구울 수도 있다.
방법은 비슷하다.
예전에는 다 집에서 만들어 먹던 것들.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
반죽이 힘들다면 밀가루 몇 숟가락에 조르르 물을 부어 휘휘 저어 재료를 넣는다.
감자, 고구마, 단호박, 부추, 방아 이파리, 대파, 송송 썬 김치 등등.
부침개를 부칠 때는 밀가루보다 주재료가 풍부하게 들어가야 맛있다.
재료와 밀가루 물이 어울려서는 달군 팬에 기름을 넉넉히 붓고,
치이익.
갓 지져서 뜨거울 때 먹는 부침개는 최고다.
같은 방법으로 기름에 튀길 수도 있다.
튀김이야 뭐,
밀가루 반죽을 잘라 튀겨서는 뜨거울 때 설탕가루만 좀 뿌려 먹어도 맛있지.
부침개나 튀김 비슷한 조리법으로 전도 있다.
보다 다양한 재료로, 계란을 더하면 된다.
애호박, 깻잎, 생선 살, 새우, 고기, 소시지나 햄, 게맛살, 김말이...
여러 재료들을 하나 또는 섞어서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물을 입혀 기름에 지져내기만 하면,
맛있는 전!
밥상에도, 술상에도, 제사상에도, 간식으로, 밤참으로 언제나 환영받는다.
시간과 열의를 내어 만두도 빚어볼까?
먼저 만두소를 만들어두고.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동그랗게 잘라낸 만두피를 준비한다.
그 안에 만두소를 채우고 끄트머리에 물을 묻혀 야무지게 여민다.
만들어진 만두는 가볍게 데쳐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언제든지 꺼내어 찌거나 굽거나 끓이거나 튀기거나.
추운 겨울밤,
뜨끈한 만둣국으로 따습고 행복해질 수 있다.
봄의 상징,
향기 그윽한 쑥을 씻어서 찹쌀가루나 밀가루를 버물버물 쪄내는 쑥버무리가 있다.
쑥버무리 한 번 해줘야, 아, 봄이로구나,
추위로 갇혀있던 겨울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고 자연의 순환을 시작하는 거다.
빵값이 많이 올랐다.
제과제빵 하는 금손이 아니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빵 대용식이 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음식 '난'과 비슷하게 소금을 조금 넣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굽는다.
안에 내용물을 넣고 돌돌 말아먹거나.
우리나라의 밀가루 전병처럼 질척하게 구워서 속을 넣어 말아서 익히거나.
고기, 채소, 김치, 새우 등 다양한 속재료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반죽을 구워 금세 먹으면,
그것도 참 맛있다.
김치 담을 때도 밀가루로 풀을 쑤어 유산균을 키우며.
낙지의 뻘을 씻어낼 때도 밀가루를 뿌려서 조물조물 씻어낸다.
고기 요리로 조리도구에 낀 기름기는 일단 휴지로 닦아낸 뒤 밀가루를 뿌려두고.
지금은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지만 예전에 집에서 떡을 찔 때,
시루와 물이 담긴 솥 사이, 틈으로 수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밀가루 반죽을 꽁꽁 둘러주었다.
밀가루 한 봉지로 음식도 만들고 살림에도 쓴다.
귀하지도 않고 고급지지도 않지만 우리를 먹이는 소중한,
이 작고 하찮은 존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