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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Dec 17. 2022

인간관계의 어려움

끄적끄적

지금 나는 예전에 가졌던 인간관계를 거의 포기한 히키코모리이고.

예전에도 나의 인간관계란 나의 영역을 사수하는,

사람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었다.


덕분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하하호호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누구나와도 친근한 듯,

그러나 상대를 봐가면서 그에 맞는 주제를 골라 그저 재미있게 중립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 파악하는 편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꽤 사교적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의례적인 관계가 정말 싫어졌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른바 사회성이 좋다거나,

인간관계가 폭넓다거나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겉보기보다 훨씬 예민하고 유약한 사람이라,

누군가와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피로감이 몹시 심하다.

이건 공적인 일도 마찬가지여서,

단순히 사무적인 일을 처리했을 뿐인데도 기진맥진.

사회생활을 하기에 참으로 곤란한 체질을 타고 난 거였다.


좋은 성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사람에게 연연하지 않는 성향이고,

남들로부터 평가받는 것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라서

혼자서도 잘 지내고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다 달라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

그래서 속으로는 좋아하거나 절대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에 없는 칭송도 잘하는 동시에

속마음을 감추지 못해 걸핏하면 험담에다,

상대와 대놓고 다투기도 하면서도.

삐그덕 삐그덕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도감을 얻는다.

내게는 신기하다.


나는 싫은 감정을 상대에게 터뜨린다는 건 그 관계가 끝이라는 표현이고,

대부분은 싫은 감정을 드러내기 전에 조용히 손절해버린다.

더 이상 피로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책들에서는,

또 인간관계 강의로 인기를 얻는 동서양 강사들은,

인간관계에서 호감을 얻는 것보다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좋거나 싫거나 좋은 얼굴을 하라는 말이다.

손절할 때는 상대방이 잘 모르게 조용히 관계를 멀리하라는 데,

이게 가능합니까?

번번이 핑계대면서 피하는 게 더 싫을 것 같은데?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라면 몰라도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또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에너지는 한정돼 있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지 타인과 에너지를 나눌지 결정해야 하는데.

나는 나에게 집중하는 편을 택했다.



그래도, 원한을 사지 말라는 충고는 옳다고 본다.

살면서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건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실용적으로 봐서도 그렇다.

심술보가 잔뜩 껴서 남 잘못되기를 바라는 시커먼 속도 싫지만

굳이 그 마음을 시시때때로 드러내면서 타인을 비아냥거리는 언행은 정말 하지 않아야 한다.

허공 중에 내던진 증오의 씨는 무럭무럭 자라서 자신을 짓누른다.

어쩌면 이미 그런 상태여서 고 따위 언행이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되도록 정중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최소한 남에게 못되게 굴지 않으려 애쓸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는 있다.

나는 절대 완벽하지 않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고.

무엇보다 너와 나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양보하는 것도 어느 정도지,

무한정 상대방 욕심을 채울 때까지 물러날 수는 없으니.

또 시기심이 많고 질투심이 심한 사람은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타인도 일일이 비교하면서 질시하고,

내면에 불행감과 열등감이 많은 사람은 행복해 보이는,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다.

무엇보다 자기 이익에 방해가 되거나 유용하지 않을 때,

사람을 걸리적거리는 돌멩이처럼 발로 걷어차는 심술꾸러기들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원한을 사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남에게 자잘한 원한을 살 수 있고.

나로서는 할 만큼 했지만 상대의 마음에 차지 않아 원한을 살 수도 있다.

착하게 살겠다고 나를 반성하기 시작하면 살을 깎아먹는 듯 괴로움이 남는다.


순백의 착한 사람은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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