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중학교 동창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 말고는 관심이 별로 없는 나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했을 때 얼굴은 기억이 났다.
30년 전에도 그렇게 성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기억 못 하는 내게 서운한 표정 없이 우리가 중학교 동창이었고,
중 2 때는 같은 반이었음을 알려주며 멀지 않은 동네에 살아 가끔 버스를 같이 탄 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날 동창은 자기 얘기를 많이 했는데 물론 나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 한 번 더 마주쳤고 다음은 두 번에 걸쳐 들은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맏딸.
두 살 아래 여동생.
어머니는 가게를 하셔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자매가 밥도 해 먹고 청소도 하며 의지하고 자랐다.
음,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어린 남동생이 등장하는 거다.
내게는 혼란이 왔지.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이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재혼하셨다는 말은 없는데?
가정사야 그 집안의 문제이지 내가 따질 일은 아니고.
중요한 점은 두 딸이 어린 남동생을 사랑하여 애지중지 키웠고.
여전히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동생이 컸다고 이제는 늙은 어머니도 걱정하고,
조카들과 친구처럼 잘 지낸다는 흐뭇한 근황이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내 아들이고 우리 동생이지 생부 생모의 혼인 상태는 다른 문제인데,
괜히 상관없는 내가 민망해하다니.
내 아이는 무조건 싸고돌고 남의 아이는 배척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우리 아이'를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필리핀 아내와 결혼한 교민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가끔 처가의 대식구가 사위에게 의지하니 짜증스럽다가도,
내가 잘못되면 내 자식들을 처가 식구들이 품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필리핀에서는 니 자식, 내 자식 촌수 따지지 않고 집안에 들어온 아이들을 모두 사랑하며 차별 없이 힘껏 거둔다는 얘기였다.
자식들을 먼저 죽이고 부모가 죽는 행태에 다들 분노하며 비난하는데.
이는 그 부모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만큼 매몰차고 독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부모 죽은 뒤에 남은 어린 자식들을,
우리 사회의 누가 따뜻하게 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