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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Feb 15. 2023

창덕궁에 가시려거든

책을 기록함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최종덕 지음,  ㈜ 눌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2006년 12월에 출간된 이 책은 표지가 낡고 한 귀퉁이는 찢어졌다.

내용은 충실하다.

창덕궁을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좋아졌음.


연간회원권을 구입해 매주 창덕궁을 방문하여 계절의 변화를 보고 싶다.

, 하고 싶은 건 많으나...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로,

정종 때 개경으로 옮겼던 수도를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건설했다고 한다.

태종에게 경복궁은 왕자의 난으로 동생들을 죽인 현장이었고

자신과 대립했던 정도전이 주도하여 건설한 곳이었으니.

경복궁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지.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경복궁이 가장 먼저 지어졌고 규모도 크게 남아 있지만,

정작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거처한 궁궐은 창덕궁이다.


태종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선호했다 하더라도 다른 임금들은 창덕궁 자체의 매력에 끌렸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조상 대대로 산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산자락에 집을 짓고 생활하는 일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경복궁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 심리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갖기 힘들다. …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데 … 경복궁은 편안한 궁궐이 아니었을 것이다.

… 창덕궁은 산림이 우거진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14, 15쪽)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 버린 뒤 창덕궁이 가장 먼저 재건되었고.

경복궁은 방치되었다가 한참이 지나 조선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축되었던 것이다.


창덕궁은 산자락에 지어진 ‘산중 궁궐’이다.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기하학적으로 궁궐의 배치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축이 없다. 지형이 생긴 대로 건물이 놓인 가운데, 건물 사이의 관계는 엄정한 질서와 균형을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잘 짜인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은 유교적 질서에 따른 궁궐 배치의 원칙과 자연과의 어울림을 함께 존중한 궁궐이다. 창덕궁의 건축은 산지에 자리한 지형적 특성에 따라 자유로운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배산임수, 전조후침, 구중궁궐, 동궁, 동조 등으로 표현되는 당시 궁궐 건축의 기본 배치 원칙을 따르고 있다. (20쪽)



조선시대 궁궐은 왕이 가족과 함께 거처하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다.

따라서 궁궐에는 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왕의 집무실이 구분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왕가의 생활을 돌봐주는 여러 분야의 일꾼들과 동시에 왕의 업무를 보좌하는 기관,

왕을 보호하는 군사력이 상주하게 되었으니.

건물들도, 드나드는 인원도 많았던 곳이다.


이 책은 순조 때 창덕궁을 그린 그림 <동궐도>를 기반으로 다른 자료들과 비교, 검증하면서 창덕궁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있는데,

지금의 휑한 풍경과 달리 조선시대 궁궐 안에는 각종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서있고,

많은 신하들이 종종걸음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던 활기찬, 권력의 핵심이었다.


전에 나는 덕수궁을 돌아보면서 금으로 궁궐을 치장하는 다른 왕조와 달리 조선시대 창립자들은 건실한 가치관을 가졌던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지은이는 조선시대의 궁궐에 대해,


왕조국가의 궁궐은 왕조의 위엄을 높이는 상징물로써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통해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건축하기 위해 막대한 국력을 쏟아부은 사례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고 검소함을 숭상했던 조선 … 태조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통해 사치스러운 궁궐을 건축하여 국력을 낭비하는 폐단을 경계했다.

(21쪽), 고 설명한다.

    

정조는  <경희궁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요,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22쪽)

정성을 다하지만 ‘검소하고 질박하게’ 짓는 것이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원칙이었다.



창덕궁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세워진 돈화문으로 시작된다.

돈화문을 둘러싼 공간은,

대궐에 들어가는 관리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고, 이곳을 지나치는 백성들에게 왕실과 조정의 위엄을 과시한다. 궁궐이 정문을 이처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한 것은 문으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에 더하여, 이곳이 궁궐임을 나타내는 한양의 주요 ‘랜드마크’였기 때문이다. (24쪽).


문 안으로 들어서면

지은이가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완충공간'(28쪽)이라고 소개하는 궁궐의 첫 마당을 만나게 된다.

 문과 담장과 행랑으로 둘러싸인 첫 번째 마당에는 궁궐과 왕의 호위를 맡아 외부 침입에 대비하는 관청들이 있다.

첫 번째 마당은,

인정전 외 행랑으로 둘러싸인...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36쪽)인 두 번째 마당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 마당은 인정문을 통해 드디어, 크고 높고 화려한, 왕의 공적 집무실인 인정전이 있는 세 번째 마당으로 이어진다.     

 인정문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인정전이 세 단의 월대 위에 우뚝 서 있다. … 인정전은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40쪽)


그러니까 창덕궁의 공간이란,

궁궐 정문인 돈화문에서 으뜸 공간인 인정전에 이르는 동안 세 개의 큰 마당을 거치면서 보이는 변화는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첫 번째 마당에 있는 나무와 물이라는 자연적 요소는 두 번째 마당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어도만이 두 번째 마당을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성은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한편으로는 어도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어도 옆 빈 마당에 깔려 있는 흙이 이 공간에 있는 유일한 자연이다. 인정문을 통해 세 번째 마당인 인정전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은 모두 돌로 덮인다. 두 번째 마당에서 존재했던 유일한 자연인 흙마저 사라진다. 자연을 배제함으로써 인정전에서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즉 첫 번째 마당에서 두 번째 마당을 거쳐 세 번째 마당에 이르는 동안 마당의 자연을 점차 줄여 나감으로써 긴장감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자연과 인공을 비교하면,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이므로 자유를 뜻하고 인공은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공간에 자연이 배제되고 모든 것이 인공으로 대체될 때 질서는 최고조에 도달하고 그 속에 있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처럼 인정전은 자연을 배제함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시킨 의도된 공간이다. 궁궐의 으뜸 공간인 인정전은 곧 왕권을 상징하므로, 왕권 앞에서의 긴장감은 곧 강력한 왕권의 공간적 표현이다. (48, 49쪽)



창덕궁은 단순히 건물과 공간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참된 왕의 역할을 고민했던 왕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영조는 왕의 언행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사필(史筆)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대공사필(大公史筆)’ 넉 자를 써서 예문관 벽에 걸도록 명령(65쪽) 한 바 있고.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학문 연구를 강조했다.


궁궐이라는 공간을 통해 왕좌의 무게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왕실 가족들의 생활도 상상해 볼 수 있었는데,

그중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에 관한 한 구절에서 목이 메었다.


사실 수백 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있는 임금은 일정하게 정해진 침전이 없었으나, 왕비는 왕비의 신분으로 있는 한평생 대조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조전의 뒷마당은 넓고 화려하다. 여기에는 징광루와 집상전이 있고, 대석 위에 올려진 세 개의 괴석과 석분에 심은 작은 소나무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경사지에는 큰 돌을 다듬어 계단식으로 석축을 쌓고 꽃나무를 심어 궁궐에 갇혀 지내는 왕비의 단조로운 생활을 배려하고 있다. (97, 98쪽)


열 댓살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서는 누구 하나 맘 놓고 의지할 사람 없이,

그저 떠도는 말과 시기, 질투에 둘러싸여 대조전에 갇혀 살다 갔을 여인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어쩌면 궁궐에서 쫓겨난 몇 명의 왕비들은 한순간이라도 자유로움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비록 비참한 슬픔 속에서라도 말이다.



지금 궁궐들은 당시와 많이 달라져서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저 담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과 사극 속 허구를 궁궐의 모든 것으로 알기 쉽겠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궁궐이 어떤 왕들은 참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되살아나면 좋겠다.


조선시대 왕과 그 역할과 철학을 알 수 있는 좋은 내용을 담은 책이다.

건물을 지으려면 먼저 그 건물의 역할과 의미를 고민하고, 방향성을 찾아 뚜렷한 답을 얻었을 때,

적절한 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겠다.

몇 달 안에 뚜다닥, 돈 얼마를 퍼부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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