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26
퇴근길, 늘 다니던 익숙한 길목에 걸린 현수막 하나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속도를 줄이면 카페가 보입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문구였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운전대를 잡으면 어느새 가속 페달을 밟고,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려는 마음에 쫓기듯 달렸던 나였다. 그 현수막을 본 순간 문득 생각했다.
‘나는 혹시 너무 빨리 가느라, 지나치는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10분 먼저 가려고 무리하다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듯, 인생도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여유를 놓치고 말지 않을까. 그 현수막 속 짧은 문장이 조용히 내 마음에 말을 걸어왔다.
“조금 천천히, 그래야 진짜 중요한 게 보인다.”
그 현수막 속 짧은 문장을 안고 떠올린 이야기가 있다.
눈이 소복이 내리던 겨울날, 운동장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작은 내기를 했다. 누가 더 똑바로 걸을 수 있느냐는, 참 단순한 내기였다. 손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걸었다. 눈밭에 찍히는 발자국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곧게, 또박또박 걷고자 애썼다. 그러다 보니 금세 숨이 차고, 불안감에 자꾸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반면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운동장 너머, 커다란 나무 하나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밑을 확인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멀리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보폭대로 천천히 묵묵히 걸어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걸어온 길을 함께 돌아보았다. 손자의 발자국은 이리저리 휘어 있었고, 망설였던 흔적도 보였다. 반면 할아버지의 발자국은 눈밭 위에 한 줄기 길처럼 고요하고 곧게 이어져 있었다. 손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답했다.
“넌 발밑만 보며 걸었지. 나는 저 건너편, 큰 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단다.
멀리 바라볼 목표가 있어야 길이 흐트러지지 않는단다.”
그 짧은 이야기 속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늘 발밑의 걱정, 눈앞의 불안, 당장의 경쟁을 보며 하루하루를 급하게 걸어간다. 그래서 자꾸 길이 틀어지고, 마음이 흐트러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잊는다. 지금 우리는 너무 빠름에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뒤처질 것 같고, 한 발이라도 늦으면 기회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삶을 채찍질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멀리.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속도를 높였지만 방향을 잃으면 그 빠름은 오히려 방황일 뿐이다. 달리기 선수가 아무리 빨라도 코스를 벗어나면 실격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무의미하다. 아무리 먼 길을 달려도 내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 긴 여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 인생도 발밑의 불안과 남과의 비교에 눈을 두느라 길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가끔은 멈춰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숨을 고르며, 지금 내가 걷는 길이 맞는지, 내가 바라보는 ‘큰 나무’는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묻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누구는 빠르게 달려도 즐겁고, 누구는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숨이 트인다. 누군가는 노래하며 걷고,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품고 걸어간다. 누군가는 글로, 또 누군가는 몸으로 세상을 표현한다. 꽃이 피는 시기와 모양이 다르듯, 삶도 그렇게 피어야 한다.
조던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다. “목표와 방향은 넘을 수 없는 장애물도 넘어가게 하고, 기회의 문을 여는 힘이다.” 그렇다. 목표는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고, 방향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게 해준다. 속도는 때로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디로 가고 있느냐이다. 눈 덮인 운동장 너머의 ‘큰 나무’를 바라보며 걷는 것. 눈앞의 발걸음에만 머무르지 않고, 저 멀리 마음에 담아둔 풍경을 따라 걸어가는 것. 머릿속에 그려둔 꿈의 좌표를 잊지 않는 것. 그럴 때 우리의 삶도 굽어지지 않고, 고요하고 단단하게 한 줄기 길처럼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로 걷고 있는가.
내가 바라보는 ‘큰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당신의 발걸음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속도보다 방향!
그것이 결국,
우리가 삶의 끝에서 웃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