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25
오랜 시간 전문직으로 살아오던 내가 다시 교단에 선다고 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사실 나조차도 그 결정 앞에서는 조금 떨리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느껴지는 묘한 긴장과 설렘은 오래전 잊고 살았던 내 모습을 다시 꺼내 주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분필 가루가 흩날리는 칠판, 종이 울릴 때마다 분주해지는 복도.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한 학기가 끝나고 첫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와, 이제 좀 쉬시겠네요.
누군가의 말처럼, 이건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였다. 그런데 막상 시간 앞에 놓이자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졌다. ‘내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걸까?’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텅 빈 거실을 바라보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생기면 하고 싶은 게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자유로워지니 막막함이 먼저 밀려왔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지. 바쁠 땐 좀 쉬고 싶다가도, 막상 쉬면 허전하고. 그래도 이런 평범한 날들 속에 나를 웃게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행복 아닐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다. 그렇게 느슨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현관 쪽에서 ‘찰칵’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보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인천으로 시집간 딸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아들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아빠 서재를 멋지게 바꿔주려고 왔지!
예고도 없이 찾아든 그 따뜻한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알고 보니, 며칠 전부터 딸은 아들, 사위와 함께 조용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빠가 낡은 책상에 앉아 수시로 끊기는 불편한 인터넷과 씨름하며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며, 딸은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며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던 딸. 그 마음이 모여 눈 내리는 날 아침, 서재 꾸미기 세트를 둘러메고 찾아온 것이다. 그날의 서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 사랑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는 공간이었다. 딸은 방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며 어디에 어떤 조명을 두면 좋을지, 책장은 어떤 순서로 정리할지, 책상 위에는 어떤 색감이 어울릴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하고 사려 깊던지, 마치 내 인생의 중요한 무대를 준비하듯 손끝에 정성을 담고 있었다.
“아빠, 이 조명은 따뜻한 느낌이야. 밤에 글 쓰실 때 눈이 덜 피곤할거야.”
“이건, 아빠 책상에 두면 기분 좋아지실 것 같아서 골랐어.”
아들은 컴퓨터 배선에 몰딩까지 하고 자잘한 소품을 정리하며 서재 곳곳에 메모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응원합니다, 작가님!”
“오늘도 좋은 글 쓰세요”
그 짧은 문장들 속에 담긴 따뜻한 응원의 마음은, 오히려 긴 설명보다 더 깊게 와닿았다. 나는 웃기만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뭉클해져 말을 잃었다. 늘 조용하던 우리 가족이, 이렇게 다정한 방식으로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걸 나는 왜 이제야 느꼈을까. 그날 하루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딸은 낡은 책장을 말끔히 비우고, 책 한 권 한 권을 다시 꽂으며 제목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뒤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꽂는 손길, 먼지를 닦는 표정, 조명의 위치를 바꾸며 내게 자꾸 의견을 묻는 그 다정한 목소리. 그 모든 순간이 내겐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재의 중심에 강아지 인형 하나가 놓였다.
“이건 아빠가 글 쓰실 때 혼자 있지 않게, 작은 친구 하나 두려고.”
이내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해졌다. 모니터 앞에 앉은 인형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딸의 말과 그 마음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 인형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밤이 깊어갔지만, 누구 하나 피곤하다는 말도 없이 우리는 끝까지 함께 했다. 딸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아들은 마지막까지 물건 하나하나에 손길을 보탰다. 그 순간,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공간은 단지 글을 쓰는 서재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마음이 스며든, 아주 특별한 장소다.
그날 이후, 나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무심히 TV 앞으로 걸어가 리모컨을 들었다면, 이제는 자연스레 서재로 향한다. 그곳에 앉아 책을 펼치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가족이 남긴 말 없는 응원을 느낀다. 책장 사이사이, 조명 아래 머무는 빛결, 그리고 작은 강아지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조용한 사랑을 발견한다.
이따금 생각한다. 부모는 늘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지만, 어떤 날은, 자식이 더 큰 사랑을 먼저 건네는 날도 있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서재에 스며든 사랑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날. 그날 이후, 나는 다시 펜을 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그 서재에 앉아 글을 쓴다. 창밖으로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따뜻한 음악이 잔잔히 흐른다. 책장 사이사이, 조명 아래 머무는 따뜻한 빛 속에, 딸의 정성과 가족의 온기가 가만히 깃들어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곳, 나의 서재는 더 이상 단지 글을 쓰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사랑이 머무는 자리이며, 기억이 숨 쉬는 곳이고, 마음이 다시 시작되는 작은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깊고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