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노인 Aug 15. 2017

#13 고양이가 벽지를 뜯는다면

그 많던 벽지는 누가 다 뜯었나

두 마리의 빙구들과 한 가족이 된 지 3개월이나 흘렀을까. 라리에게 아주 못된 버릇이 생겼다. 바로 바닥 몰딩(걸레받이 부분)과 벽지를 뜯는 것! 우리 집은 바닥이 타일이라 벽과의 이음매를 실리콘으로 마감해놨는데, 이를 뜯으면 마치 오징어처럼 길고 쫀쫀한 느낌이 든다. 라리는 바닥에 게으르게 누워서 평소 갈고닦은 발톱을 세운 후 마치 장인처럼 이를 섬세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길게 뜯긴 몰딩을 너무나 당연하게 씹어먹는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식감이 쫀득쫀득하고 좋은 건 알겠으나 몸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막아야 했다. 고양이들은 태생적으로 시트러스 향을 싫어하기 때문에 레몬즙을 뿌려보기도 하고 몰딩을 뜯을때마다 잡아다 혼을 내기도 했지만 녀석의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날로 수법이 교묘해져, 레몬 냄새가 날아가면 해당 부위를 다시 뜯거나, 우리 부부가 깊이 잠든 야심한 밤에 몰딩을 질겅질겅 3류 건달처럼 씹기도 했다. 

저렇게 안방의 반을 뜯어놨다

하지만 녀석이 간과한 건 내가 성격이 예민하며 귀가 매우 밝다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나는 평소 잠귀가 밝아 귀마개를 하고 자는데 그럼에도 마리나 라리가 거실에 있는 화장실 모래에서 똥을 싸는 소리를 듣고 깰 정도였다(더 정확히는 화장실에 똥이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자다가도 라리가 몰딩 뜯는 소리가 나면 일어나서 궁둥이를 때려 혼을 냈고, 다른 방에 있다가도 낌새가 이상하면 녀석을 찾아서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와이프는 라리가 자주 뜯는 몰딩 부위를 테이프로 막아버리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라리가 조심스럽게 발톱을 꺼내 살금살금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몰딩을 뜯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녀석은 벽지로 대상을 바꿨다. 몰딩을 뜯으며 혼난 이후로 라리의 수법은 점차 교묘해졌다. 캣타워에 앉아있는 척하면서 발톱을 날카롭게 세워 우리 눈치를 보다가 조금씩 벽지를 조금씩 긁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우리가 눈치챌 것 같으면 얼른 뒤돌아서 아닌 척 딴청을 피웠다. 난 종종 저놈이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어쨌든 당장은 최선을 다해 라리의 만행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집이란 공간은 벽지 천지였고 내가 아무리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어도 집을 비운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 집은 곳곳에 땜빵이 생기고 말았다. 

라리는 벽지를 뜯어서 씹고 밷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쯤 되자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했거니와 반복적으로 혼이 나는 라리 역시 눈치 보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원인 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 건 마리는 이런 행동을 거의 하지 않는데 왜 라리만 그러냐는 것이다. 라리가 특별히 마리에 비해 더 강력한 파괴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거나 성격이 못돼 처먹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음… 일단 그렇다고 가정하고 싶었다. 아무튼 둘의 행동엔 명확한 차이가 있었기에 우리 부부는 둘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스크레쳐. 고양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무기인 발톱을 갈고닦아 날카롭게 만드는 습성이 있다. 물론 집안에 캣타워가 있고 여기저기 긁을 수 있는 스크레쳐들을 놔뒀지만 마리에 비해 라리가 이를 덜 사용한다는 걸 관찰을 통해 깨달았다. 대체 왜? 여러 가지 가정을 해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취향에 안 맞아서.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취향과 높이가 맞지 않아서였다. 

이때만해도 크게 벽지를 뜯진 않았다

고양이에게 스크레쳐 취향이 있다면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리는 스크레쳐를 딱히 가리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반면 라리는 삼줄로 된 굵은 스크레쳐를 선호한다. 발톱이 더 커서일 수도 있고 정말 그냥 취향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집에 있는 캣타워로는 그의 강력한 욕망을 풀어주기 힘들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라리의 경우 팔을 위로 끝까지 쫙 뻗어 손톱을 긁는 편인데 기존의 캣타워는 라리에게 작아져 팔을 뻗으면 스크레쳐가 감긴 부위가 아닌 캣타워의 나무기둥 부분을 긁게 됐다. 쉽게 말하면 시원하지 않다는 소리다. 

아깽이용 캣타워는 5개월 미만 까지가 적당하다

캣타워를 당장 바꿔주기엔 좋은 캣타워 들은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나에게도 돈의 준비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선 삼줄로 된 스크레쳐 타워를 대령했고 후로 눈에 띄게 벽지나 몰딩을 뜯는 습관이 줄어들었다. 이 글을 본 독자분들 중에 집의 고양이가 자주 벽지를 뜯거나 가구를 긁어 재낀다면 당장 혼내는 것에 주력하기보다 그들의 스크레쳐 취향을 파악해보길 추천한다. 당신의 고양이는 절대 못되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맞춰주지 못한 것뿐이다. 


마라리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작가의 이전글 #12 고양이 예방접종은 반드시 필요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