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의 비행기표를 보며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마음.
노트북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비행기표가 보였다. 비행기표를 가만히 만지작 거리다가 깨달았다. 이제 나는 이런 비행기 티켓에도 설레지 않는구나. 나는 반쯤 뜬 건조한 눈빛으로 그 위의 숫자를 읽으며 '이런 건 SNS에 가리지 않고 올렸다가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가 예전부터 이렇게 비행기표를 보며 심드렁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괌에 갔을 때, 나는 모든 게 신기하고 신났다. 모든 게 새롭고 설레는 일들 뿐이었다. 그리고 여권에 꼽힌 비행기 티켓은 그 설렘을 대표하는 물건이었다. 그 이후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도, 독일에 처음 정착하러 갔을 때도 나는 비행기 티켓에 항상 설레었다. 그 티켓들을 모아 두고 다시 보며 여행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럽에 있으면서 저가항공을 타고 여행을 자주 해서인지 나는 점점 비행기 티켓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다가 결국 설레기는커녕 예전 같았으면 봉투에 모아놓았을 티켓을 책상 위에 나뒹굴게 하고 개인정보 유출 걱정이나 하는 건조한 눈빛과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설레는 게 많았다. 나는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1200원짜리 과자를 살 때 두근거리던 마음을 기억한다. 그 과자의 개별포장을 하나씩만 뜯어먹으며 아껴먹었다. 항상 200원짜리 어묵을 먹다가 장이 서는 날 한번 수제 어묵을 사 먹는 날이면 나는 왠지 그날 더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제 내가 그 정도 특별함, 설렘을 느끼려면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어야 한다. 비싼 술을 마셔야 한다. 아니면 소박한 것이어도 여행 중에 먹는 것이어야 한다. 설레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것은 항상 시시해진다. 어묵이 시시해지고 외식이 시시해지고 기차가 시시해지고 비행기도 시시하다.
내가 특별하던 것을 더 자주 누리게 될수록 얼마나 많은 것이 시시해질까.
이런 생각에 두려움이 들었다. 허무하기도 했다. 지금 원하고 지금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은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설 때만 먹을 수 있었던,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수제 어묵처럼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뭔가를 자주 누리게 되면 항상 그 이상의 것을 바랐듯 나는 항상 또다시 새로운 특별함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거의 모든 것들에 싫증이 나지 않을까? 특별한 것을 누리지 못하면 누리지 못해서 슬플 거고 누리게 되면 시시해져서 슬플 것이다. 어떻게 되든 특별한 것은 얻기 어렵고 특별하지 않은 것은 시시해서 지겹다. 어쨌든 지겨운 매일을 살게 되고 얻고 싶은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닿지 않는 특별함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독일에 사는 것도 처음부터 권태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집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5, 6개월 살았을 즈음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베를린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어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는데 내 눈이 '다시 지겨운 곳으로 돌아왔다'고 말을 했다. 베를린을 떠나면서도 2년이 채 안되게 살았던 만큼 좋은 기억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많이 알았지만 그만큼 아픈 기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많았기 때문에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익숙해진 길에는 곳곳에 너무 많은 기억이 있다. 기억들이 쌓여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쌓여 지겨워진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땐 간판을 읽는 것도 즐거웠고 광고도 나에겐 광고가 아니었다. 어차피 나에겐 새로운 스타일의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짧은 영상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익숙해졌고 무덤덤해졌다. 한국에서 간판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것처럼 나도 독일에서 굳이 간판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길이 어떻게 생겼고 거리에 뭐가 있는지 인식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을 보러 나왔을 뿐이고 길에는 항상 같은 건물들, 같은 돌바닥이다. 의식할 필요 없이, 장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면 발이 나를 마트로 데려다 놓는다. 나는 주변을 보지만 주변을 보지 않는다.
예전에 독일인 친구가 밥을 남기려는 나에게 잔소리를 한답시고 말했다.
"미국의 어떤 인디언 부족은 고기를 잡으면 빠짐없이 고기를 사용한대."
아마 엄마가 그 친구에게 밥상에서 항상 해주던 말이었나 보다.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그 부족도 고기가 넘쳐나면 맛없는 부위는 버릴 거야."
어떤 부족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신성하다거나 하는 건 없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서 살뿐이다. 아마 30년 전, 40년 전만 해도 튀긴 통닭 한 마리는 특별했을 거다. 하지만 그 시절을 살던 엄마와 아빠는 2020년에 치킨을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기뻐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냥한 고기를 남기지 않고 모두 사용한다는 부족도 고기를 얻기가 힘들고 배를 채우기 급급하기 때문에 고기를 남기지 않는 것이지 고기가 흔해 빠진 상황이 오면 더 이상 남는 고기에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배부른 소리를 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저 인디언 부족과는 달리 지금 배를 곪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 생존을 위한 것 이상의 것을 사치하고 있고 더 많은 사치를 원한다. 이제 어차피 생존에는 문제가 없고 욕심에는 끝이 없어 갈망만 하게 되는데 더 얻을수록 질리는 것만 늘어난다. 때문에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결국에는 얻지 못하기를 원한다. 아니 계속 원하기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결국에 내가 성취하고 성취해서 최고의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모든 것에 질려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작은 성취의 맛으로도 삶을 지속할 수 있으니까.
퍼스트 클래스석에 질려버리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퍼스트 클래스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주변에 그래도 남아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