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감정은 슬픔일까 우울일까
독일어를 배워서 독일 현지에서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Traurig(트라우리히/트라우릭)가 독일어로 '슬픈'이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가 요즘 '트라우리히'했다고 하면 난 그저 슬픈 거라고 생각하고 '왜?'라고 묻곤 했다. 그런데 그땐 몰랐지만 독일에서 좀 더 지내보니 트라우리히는 '슬픈'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울한'이라는 뜻도 있었다. 그 친구는 '왜?'라는 질문에 슬픈 영화를 봤다거나 슬픈 일을 겪었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아마 슬프다기보다는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다였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감정이 목에 걸린 것처럼 다른 것엔 아무 신경 쓸 수 없고 그 감정이 뭔지 어떻게 빼낼 수 있을지에만 몰두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떤 때에는 그것에서 도망치고 어떤 때에는 직면해서 어떤 감정인지부터 확인해본다. 이번에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는데 처음엔 일부러 친구들과 약속을 많이 잡아 도망쳤고 그다음에 그 약속들이 다 지나갔을 때 나는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직면한다고 바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감정이 불쾌한 것은 알겠으나 어떤 불쾌한 감정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아무것도 못하는 걸 보니 나는 아마도 무기력하고 우울한가 보다.'
'아니면 어떤 것에 대해 슬퍼하는지도 모른다.'
'부정하지만 서운해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도대체 내가 뭘 느끼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며칠을 널브러져 있었다.
감정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온다. 이것저것 뭉쳐져서 어떤 것인지 제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내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것은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어떤 이가 강박이라고 이름을 붙인 감정에 나는 불안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강박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이든지 상관없이 나는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감정은 둘다였을 수도, 둘 다 아니었을 수도 있다.
강박과 불안처럼 나는 슬픔과 우울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없다. 내 감정에 굳이 하나의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내 목에 걸린 감정이라는 알사탕은 내가 그 알사탕에 이름을 지어 붙여주지 않아도 언젠가 녹아서 다시 내가 움직일 수 있게 할 것이다. 어떤 알사탕인지 아는 것,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조금은 안심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탕을 녹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차피 그 사탕이 녹아 내 목을 지나갈 때까지 생산적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바람 좀 쐬려고 산책을 나갈 채비를 하다가 문득 Traurig(트라우리히)가 떠올랐다. 그래 나는 아마도 슬픔과 우울을 동시에 느끼는지도 모른다. 나는 슬픔을 느끼거나 우울을 느끼는 게 아니라 '트라우리히'하다고.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더 빨리 녹지는 않겠지만 뭐가 걸려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묘한 안심을 줬다.
그다음에는 그 원인을 찾아 헤매곤 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원인을 찾고 싶은 게 아니라 핑계를 찾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떤 것 혹은 누군가가 내 감정의 책임을 짊어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면 그 이유는 내가 되고 어떤 이와 연결이 닿아있었다면 그 사람에게 이유를 찾았다.
'요즘 비가 많이 와서 인가?'
'내가 요즘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인가?'
'주변 사람들이 날 돌보지 않아서인가?'
하지만 우울의 시간은 대게 예고 없이 그냥 그렇게 왔다. 그래서 딱히 이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를 하거나 이유를 찾아보기나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 비슷한 것을 찾아보는 것은 그만두고 그냥 그대로 지나가 보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마 이유가 있었고 내가 이 감정 때문에 하게 되는 행동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내 모든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까지 통제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감정을 다 뜯어보고 싶은 것이지만 감정이 만들어 내는 행동에는 문제가 없다. 나는 행동을 통제하고 다른 행동을 하면 다시 또 그 감정을 부풀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나를 열심히 통제해서 아무도 내 감정을 눈치 못 챌 정도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나의 괴리가 심해져 힘들어졌다. 감정이 만들어 내는 행동을 그냥 하도록, 내가 나를 통제하지 않도록 내버려 둬야 그 감정은 쌓이지 않고 해소될 수 있다.
내가 트라우리히의 뜻을 예전부터 알았다면, 자신의 연애 상대도 아니었던 다른 친구가 도시를 떠나는데 왜 트라우리히한지 모르겠다던 친구에게 나는 아마도 굳이 '왜'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 친구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에게 했을 것처럼 나도 나에게 스스로 '왜'인지 묻는 것을 멈추고 '그냥 그럴 수 있다'라고 얘기해주기로 했다.
"그래, 그 감정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자연스럽고 그에 따른 행동도 전부 통제할 필요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