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다르죠?
독일어를 한국에서 배워 독일어의 감을 잘 모를 때 나는 기쁜froh과 행복한glücklich를 섞어 쓰곤 했다. 같이 살던 폴란드 가족의 엄마가 딸이 기뻐froh했다고 했는데 기쁜froh과 행복한glücklich 이 차이가 있냐고 내가 물었더니 차이가 있다고 행복이 더 깊은 의미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쁨은 잠시 동안이고 행복은 삶의 총체적인, 복합적인 경험인 것이다. 딸이 기뻐했던 것은 그의 다섯 살 인생의 복합적인 경험이 아니라 잠시의 간식이 주는 긍정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당연히 단어의 뜻이 다른데, 쓰임이 다른데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도, 한국인인 내 주변 사람들도 행복을 기쁨이라는 단어 대신에 쓰기도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독일 대학에 합격했을 때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행복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합격소식을 전화로 확인하고 그냥 눈물이 주르륵 나고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만났던 언니를 껴안고 울었다. 한동안은 매일 별일 없이도 실실 웃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이게 행복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사실 행복이 아니라 그냥 강렬한 하나의 기쁨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이 행복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자주 여행을 같이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이게 행복이지', '행복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여행은 하나의 로맨틱 경험이다. 낭만이다. 여행에서 얻는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사람과의 경험이 아닌 관광지 찍고 블로그에서 찾은 맛집 찍는 이미지로서의 경험, 미디어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경험, 이미지 안에서 주인공으로서 존재하는 경험이다. 나는 그 경험이 결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행복의 감정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하지 않는 경험. 이것은 그저 하나의 흉내내기, 존재하는 여행지의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과 풍경을 모두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낭만'이 주는 것이 과연 행복한 감정일까?
그리고 그 친구는 그런 행복의 경험을 하면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영상들을 올리면서 행복하다는 걸 쓰기도 했다. 그 친구뿐만이 아니라 나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비슷한 게시물을 많이 보았다. 나는 그 게시물을 보면서 행복하다는 것이 잘못 쓰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쓰인 사실 말고도 맥락적인 의미가 있다. 어떤 곳에 어떤 때에 무엇을 말했는지는 말해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굳이 행복하다는 것을 '소셜 네트워크'에 여행사진과 써서 올리는 것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의 행복 말하기 기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행복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걸 그림으로 그려서 글*과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한창 여행사진 올리고 행복 해시태그를 달던 친구는 넌 행복한 감정을 느껴보지 않아서 그걸 공감할 수 없다는 댓글을 남겼다.
*같이 올린 글:
행복이란 단어는 모순적이다
많이 말할수록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Das Wort, Glück ist eine Ironie
Je Öfter man das sagt, desto unglücklicher sieht er aus
아마 이건 그 친구가 정의하는 행복이라는 단어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단어의 괴리에서 온 의미 없는 토론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행복을 찾아 독일에 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히려 외로움을 찾았다고 답할 것이다. 타지에 이방인으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은 행복의 감정이 아니다. 물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 이국적이고 성공한(?) 느낌은 나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네가 위너다, 행복하게 사는구나 하겠지만 타지에 산다는 것은 한없는 텅 빈 마음으로 부유하는 것이다. 행복은 나의 성취나 사는 곳이나 사치품이나 이국적인 어떤 것, 로맨틱이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매일매일이 걱정 없는 아무 문제가 없는 나날들이 아니다. 걱정과 문제들을 헤쳐나가면서 얻는 모든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행복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함을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곳저곳 이용되기 쉬운 단어다. 누가 행복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모든 상품들, 서비스들과 연결되어 마케팅에 사용되고 있다. 가장 쉬운 예시는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모든 즐거움과 로맨틱, 행복감을 TV광고에서 뿐만 아니라 캠페인과 사용자 경험에서도 코카콜라와 코카콜라의 청량감과 연관 짓는다. 사실 코카콜라가 맛과 탄산으로 다른 탄산음료들보다 특히 뛰어나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마케팅은 그 상품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도 존재하게 만든다. 코카콜라(펩시 X)를 마시면 우리도 모르게 그 이미지를 샀다고 믿고 음료 대신에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이미지에 과다 노출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가져야 된다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뿐인 허상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질 것인 저 행복을 나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고 묻는다면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내가 불행했다고 믿는 삶의 기간이 있었고 어떤 게 나에게 불행인지 행복인지 구분할 수 있고 그 불행은 지나갔으니 나는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에게 이 질문의 답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나는 불행하지 않는 한 행복하다. 행복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행복은 강렬한 감정도 뚜렷한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알맹이 없는, 만들어진 행복의 껍데기를 좇을 필요가 없다. 그저 나는 오늘의 1분 1초 앞도 알 수 없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을 사는 것, 기대하는 삶을 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