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
누군가 내게 예쁘다고 하면 그것은 칭찬일 것이다.
예뻐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한국에서 길 지나다니면서 캣콜*을 들어보거나 한적은 없다. 누군가 번호를 물어본 적은 있다. 소개팅을 제외하고는 나의 겉모습을 보고 다가오는 일이 적었다. 나는 평범했고 많은 사람들이 낯선 곳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의 낭만적인 '번호 따임'을 꿈꾸기는 하지만 길에서 추근덕대는 일은 홍대 늦은 밤거리에서도 느낄 수 없다(다들 취했는데도 선은 어느 정도 지킨다). 짧은 치마를 입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입기 때문에 특별히 아래위로 훑음 당한 적은 없다.(할머니,할아버지 제외)
*캣콜 : 휘파람을 불며 '어이 아가씨 예쁜데~ 어디가?' 하는 등의 행동들
독일에 와서 갑자기 평범한 내국인에서 예쁘장한 동양 여자가 됐다(우리가 그저 그런 서양인도 괜찮게 보듯이). 나는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라 지나가는 동양 여자가 됐고 하나의 물건 같은 게 되었다. 나는 독일어를 못 알아들을 것처럼 생겼기 때문에 원래는 속닥이면서 했을 얘기를 면전 앞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봐도 어리바리한 아시아 여자애인 나는 거지들도 쉽게 시비 걸었다. 마트에서 뭘 사려고 줄을 서있는데 거지 할아버지가 '헤이, 너 프리티 걸, 무슨 일이야?'라는 말을 한다던가 옆 테이블에서 나와 친한 언니가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그걸 보고 '쟤는 좀 그런데 쟤는 괜찮게 생겼지 않아?'라던가 술집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대화 주제가 어쩐지 모두 중국으로 바뀌고 심지어 그냥 내가 기차에 탔는데 맞은편 자전거 들고 탄 사람들이 중국 얘기를 한다던지. 기숙사로 가는 길에 갑자기 앞에서 신발끈 묶는 척을 하면서 내가 옆을 지나면 따라와서 의미 없이 말을 건다던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느냐 마느냐 쑥덕인다던지.
완전히 익명으로 유령처럼 떠돌 수 있었던 나는 주목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래서 무표정을 연습해야 했다. 친절함의 웃음도 쉽게 보일 수 없었다. '오픈 마인드'라고 생각했던 서양의 나라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찾아주다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말을 거는 줄 알았던 아저씨는 '주말에 같이 파리로 데이트 가자'라고 했고 버스정류장에서 말을 걸었던 또래 애는 바로 친구 집으로 나를 초대하려 했다(물론 진짜 기타 치고 놀려고 불렀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입던 짧은 치마는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들에서 나는 로맨스보다는 공포를 느낀다. 베를린에 온 지 일주일이 안됐을 때 파리로 데이트 가자던 아저씨와 한밤 중에 지하철역으로 걷는 중이었고 나는 처음 오는 곳에 지하철역도 모르고 술 취한 사람들이 보이는 가로등도 어두운 거리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뭐래 미친 늙은 새꺄'를 삼켰다. 한국에서 원주역에서 알바 버스를 기다릴 때 자기 이상형이라면서 번호를 알 수 있겠냐고 하는 아저씨에겐 무서워서 진짜 번호를 줬다. 알바 버스 타고 가지 말고 자기 차로 가라는 말에 살고 싶어서 도망쳤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예쁜 것이 좋은 것인지이다.
어차피 겉모습을 보고 말 거는 사람들,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 어차피 가짜 아닌가? 겉모습이 특별히 예쁘지 않다면 그건 겉모습만 보고 다가오는 멍청한 사람들을 거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화장을 해서 나를 좋아할 사람이면 나는 그 화장을 벗지 못할 것이다. 내가 쓴 웃음의 가면을 벗은 모습도 보여줄 수 없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도 자주 들으면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고 나는 그 사슬에 스스로 감기고자 한다. 그들의 시선 없이도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고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그들의 눈을 심어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예쁘다는 말은 잠재적인 욕이다. 들을 때는 기분이 좋겠지만 그다음에는 거울의 나를 보는 데 시간을 들이고 화장하고 나를 치장하는 데 돈과 시간을 씀으로써 그 잠재적인 욕의 대가를 치른다. 나는 결국 나를 스스로 상품화시키게 된다.
예쁜 것은 액세서리이다.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것은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를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은 그 하나의 예쁜 액세서리를 한번 착용하고픈 욕구에 불구하다. 예쁜 것은 불편한 것을 감내한다. 코르셋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크롭티, 미니스커트, 하이힐이 있다. 예쁜 것은 조각처럼 전시된다. 뛰지 않고 (그 옷으로 사실 뛸 수도 없다) 많이 말하지 않는다.
외모지상주의의 사회에서 예쁘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자유이다. 평가받지 않을 자유, 액세서리로 보이지 않을 자유, 귀찮은 멍청이들이랑 말하지 않아도 될 자유, 시선으로 부터의 자유...
내가 너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니면 내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고 해도 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이미 초등학생 때 못생김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는 복이라는 내용의 일기를 일기장(담임선생님이 읽는 일기장)에 썼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지금 내 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단어는 하나의 가치만 가지고 있지 않다. 항상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가 혼재한다. 예쁜 것은 긍정적인 것, 못생긴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마치 '우울'이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긍정적인 가치가 있듯이.
++사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게 편하기도 하다. 우리는 광고 이미지들, 패션 이미지들이 모두 포토샵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어차피 비포before 이미지도 모른다. 수 없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그 이미지들은 나중에 내 몸을, 내 얼굴을 평가하는 데에 동원된다. 그 데이터는 마치 우리가 주변 인물들을 보고 평균치를 매기듯이 그 모델, 배우, 아이돌 이미지들을 모두 혼합하여 평균값을 뽑아낸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어차피 절대 만족스러운 외모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이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프사를 평가해주는 가해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