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 싶을 만한 것이 되기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박을 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스럽지 않다거나, 남자가 되고 싶냐는 얘기를 듣는다. 또는 너는 줘도 안 먹는 다던가 누가 너를 찍고 싶냐며, 성범죄나 불법 촬영의 표적이 되었을 때도 피해사실은 피해자의 Fuckable이라는 요소에 초점이 맞춰진다.
박을 만한 존재가 된다고 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냥한 것, 여성의 복장을 한 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Fuckable한 존재로 광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물론 피해자는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 그저 모범적인 여성의 모습을 따랐을 뿐, 여성복 코너에서 옷을 샀을 뿐이다. 성범죄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베푼 호의, 친절, 피해자의 평소 착의, 외모로 피해자는 검열받는다. 피해자에게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명백한 가해행위는 피해자의 친절보다 순수하게 여겨진다.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고 가해자의 나이가 50이 넘었을지라도.
이런 모순적인 사회의 시선에서, 위선적인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여성들은 박을만한 존재가 되기와 그렇지 않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남자가 되고 싶냐는 말은 듣지 않으면서 피해자가 되어도 내 행동이나 착용한 옷과 액세서리 때문에 꽃뱀으로 몰리지 않을 정도의 모습으로.
여성이 주도하는 페미니즘에서도 여성은 검열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사회에서 여성을 검열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처럼 페미니즘에서도 올바를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갈라놓는 것에 열심이다. 페미니즘을 배우는 여성은 자신을 검열한다. 어떤 것이 페미니스트로서 올바르고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불러야 할지 고민도 한다. 자신에겐 페미니스트가 될 그런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남성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여성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지향함을 보여서 잃을 것도 많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검열하는 피로에 지친다. 반면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기가 쉽다. 특별한 남성류가 된 것 같은 느낌. "난 여혐하지 않으니까 페미니스트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여혐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여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여혐이 뭔지 모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난 여자 좋아해!"
여혐은 여성을 갈구함으로써 생기는 부산물이다.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한다는 것을 아는 백인 남성이 나에게 물었다. '넌 왜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긴 머리를 하고 있어? 넌 위선적이야.' 나는 같은 학교의 트랜스젠더 친구에게 그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나에게도 해보라고 했다. "남성이 여성의 착장을 하는 것은, 심지어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용인되나 여성이 '여성의 착장'을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금기고 여성이 남성의 착장을 완벽하게 입어내는 것은 과하다." 여성 정치인들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발등이 보이는 구두를 신는다. 또 나는 그에게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면서 왜 아무것도 변하려고 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런데 왜 항상 꾸밈의 압박을 받는 것도 여성이고 그 압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여성인가? 그동안 나태했던 자신을 뒤돌아보고 관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성들에게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은 것을 재단하려 하는가?
멍청한 질문 하나에는 모든 것을 압축할만한 현명한 답 10마디가 필요했고 그 답 10마디에는 다시 또 멍청한 질문이 계속됐다. 화장한 자신의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며 '난 너무 예뻐, 난 페미니스트야'라고 하는 그 멍청한 백인 남성과는 다시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꾸미라면서 왜 연락을 끊냐고 묻는다면 그건 집에서 혼자 놀이로 화장한 것이고 그런 짓은 변태 예술가들도 많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전시장에는 완벽한 권력 남성의 착장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변태 예술가들의 특징이다. 그리고 남자가 화장을 하고 여자가 머리를 민다고 해서 사람을 페미니스트로 만들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패션으로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 책은 너무 두껍다.
이전에 어떤 대선에서 어떤 여성 정치인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했지만 과거에 한 실수에 대해 화자가 됐다. 어떤 친구는 그래서 그 여성 정치인은 페미니스트로서 잘못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한 남성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다. 그 정치인은 페미니스트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원래 지향했던 정치적 목표에 비해 실망할 만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페미니스트로서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정도다. 하지만 여성 장관이 대처하지 않은 외교관의 성추행엔 남성 대통령의 공식적인 성범죄 정치인 옹호 입장보다 더 큰 실망을 한다.
페미니스트 선언이 여성들에게 어려운 과제인 것에 비해 남성들은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니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던가 자신은 어머니를 존경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라던가 하는 것을 보면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검열받는 것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여성이 82년생 김지영만 봐도, Girls can do anything 폰케이스만 껴도, 정작 본인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티즌들이 페미니스트로 정의해준다. 그리고 검열을 시작한다.
페미니즘을 티 내지 않으면, 페미니스트로 선언하지 않으면 그 검열은 멈추는가? 그렇지 않다. 여성은 언제나 여성다움을 요구받고 그 여성다움은 바로 Fuckable함이다. 남성이 어떤 여성을 잘만함, 어떤 여성을 그렇지 않음으로 나눔에 따라 "여성"과 "여성이 아닌 여성"으로 나뉜다. 중년 여성이 "나도 여자다"라고 말하거나 "엄마도 여자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세히 해석해보면 그렇다. 중년 여성도 여자고 엄마도 당연히 여자다. 하지만 그 말에는 중년 여성도 예뻐질 수 있고 꾸밀 수 있고 엄마도 꾸미고 싶은, 연약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재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중년 여성, 엄마는 보통 여성으로 여겨지지 않고 꾸미지 않고 예쁘지 않고 연약하지 않은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여자 착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다움을 Fuckable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에서 사회에서 짜 놓은 틀이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성은 남성다움을 위해서 권력을 증명해야 한다면 여성은 그 권력에 순응할 수 있는 특성을 보여야 한다. 강함을 과시하는 것은 남성, 약함을 전시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고 어떤 남성에게 남성다움을 요구하며 남성성을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남성은 사람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이 되기 위해 아무런 꾸밈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남성은 그런 의무를 지지 않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제2의 성처럼 "제1의 성"인 남성은 인류를 대표하고 여성은 하위 카테고리 안에 든다.
Fuckable 검열에서 박고 싶을 만함을 인정받으려면 그래서 필수로 꾸미는 일이 필요하다. 예쁜 것까진 아니어도 립스틱을 발라 여성임을 증명해야 한다. 편하게 통이 큰 바지를 입어도 되지만 찰랑거리는 소재여야 한다. 그 아래 신는 구두는 굽이 높을 필요는 없지만 발등을 드러내야 한다. 운동을 할 땐 바지 없이 레깅스를 입는다. 불필요한 크롭티를 입기도 한다. 여성은 어디에서든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다. 거기에는 에너지가 든다. 화장하고 털을 정리하고 옷을 여러 가지 스타일을 두고 매일 다르게 골라 입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필요한 에너지는 원래 자신의 커리어에 쓰여야 했던 에너지였을 것이다.
대놓고 여성을 가치 절하해 적게 채용하는 보이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방법도 있다. 이런 차별 방법들은 여성을 커리어에 힘 쏟지 못하도록 한다. 분산된 에너지는 결국 커리어에 지장을 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매끈하게 덮여있는 진실을 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도덕적 관점을 이 글에서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여성들에게 모든 세상의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남자들의 착장을 입어보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것이 불가능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떤 직업은 직업의 전문성 외에도 여성성을 요구받는다. 나는 일을 이제 막 시작한 개인에게 그 일이 이상적인 그림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그 일을 당장 때려치우라거나 상사나 높은 곳에 이의를 제기를 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일단은 그 일을 위해 힘을 키우라고 하고 싶다. 정상에 오른 배우들은 처음에 아주 말도 안 되는 역할을 받고 섹스머신을 연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다 참아내고 결국 영향력 있는 개인이 되어 좋은 작품을 맡고 여성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후배들을 이끌어 간다.
커리어뿐만 아니라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멍청한 사람들에게 페미니즘 검열을 받는 게 너무 싫다면 차라리 Fuckable 한 모습을 유지하는 게 정신적으로 편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겉모습과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이 쓰이더라도 자신의 신조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면 원하는 겉모습을 유지하고 그 겉모습은 페미니즘의 정답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리가 지금 남성의 64퍼센트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은 우습게도 같은 일에 "50퍼센트"의 임금을 받고 일했던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 디자이너는 지금 원로 디자이너가 됐다. 처우가 이상적이지 않고 차별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가 되어버리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에게 같은 요구를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항상 점점 더 발전해가고 여성 전문가의 입지를 두텁게 만드는 것은 그 부당한 처우에 인내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온 여성들이라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