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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보호하는 것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나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by Faultier

요즘 듣는 팟캐스트(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가 심리상담 팟캐스트라 심리분석과 아동심리에 대해 많이 듣게 되는데, 그중에 인상에 남았던 것은 아버지가 나를 때릴 때 그것을 그냥 방관했던 어머니를 아버지보다 더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신뢰관계를 망가뜨리고 나의 무의식 속에 남아 성인이 되어서도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걸 들으면서 가정 내의 상황은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내가 피해를 당했을 때 내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가해자와 '화해'하라던 친구들. 그 친구들에게 한참 후에 분노의 응어리들을 쏟아냈지만 사실 아직도 밉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호받지 못했을 때 분노를 가지게 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을 때에도 나에 대한 분노가 생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을 때 침묵한 것에 대한 분노. 그 화는 속에서 숨어져 있다가 언젠가 곪아져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 순간에는 숨길 수 있지만 결국엔 한참 후에 '내가 왜 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눈물이 주르륵 나지?', 가만히 있다가도 '걔가 그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지?' 하면서 뜬금없이 떠오르는 장면들과 뜬금없이 올라오는 묵은 화가 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건 그 사람을 피하면 되지만 내가 나와의 신뢰관계가 깨지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 나는 분리될 수 없는 나 자신을 혐오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잘하지 못했지만 독일에서 내가 쌓인 화가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쌓였던 화도 다 끄집어내서 메일로 분출해버렸다. 그걸로 내 안에 있는 분노를 깨끗이 없애버릴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때마다 눈물이 나던 상황설명에도 울음이 나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으면 가해자는 내가 피해야 할 대상이었는데 화를 내니까 가해자가 내 눈치를 보고 변명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화내는 상황이 즐겁지만은 않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 당장 화를 내지 않으면 집에서 혼자 덜덜 떨면서 잠도 못 자고 이불을 뻥 차고 일어나서 씩씩대고 울고 그 자식을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다가 그걸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고 내가 잘못 행동한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자식의 잘못된 행동을 용인한 것은 아닐까, 내가 만만해서는 아닐까 별의별 생각으로 다시 자신을 깎아내리고 반복되는 무기력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겪을 불이익 생각하지 않고 지른다. 사장이 나한테 소리를 지르면 나도 걔한테 소리를 지르고 걔가 또 나한테 비아냥 거리면 나도 걔가 잠 못 자고 침대에서 씩씩거리면서 생각할 만한 비아냥을 해준다. 복수하고도 너무 분하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삼킨다고 해서 삭히지 않는다. 그래도 내 밖에 적을 만드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그래도 나를 위해 무언가 조치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신뢰 있는 존재가 된다.


사실 이런 인간들과 같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 가끔 회의가 온다. 그리고 요즘 자주 쓰이는 '인류애를 잃는다'는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저 인간들이 저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에 쓸 것인가(물론 나는 그런 인간들이 파산하는 데에 힘쓸 것이다)', '친구는 있을까', '정말 병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혹시 이것도 피해자가 하는 가해자에 대한 연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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