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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Cry

망자의 청각, 파우스트 레퍼런스

by 임경주


망자의 마지막은 청각이라고 한다.

인체의 모든 기능이 끝난 상태에서도 소리는 귀에 들려 자식들이 하는 말을 모두 다 듣고 간다고 한다.

참이든 거짓이든, 난 이 말을 믿는다.

미워도 아부지 고생하셨어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내 마지막 인사를 듣고 아들 나도 미안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



30년 무명배우였던 영진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탑스타가 되었을까. 몸값이 드라마 편당 3억을 찍고 당대 둘째라면 서러울 최고의 여배우 서은과 결혼에 성공한 그의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석탄가루 날리는 갱도에서 스물한 살 청년 영진이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어느 절간 바람에 흔들리는 물고기 풍경을 보고 난 뒤였다.

물고기는 풍경에 잡혀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대로의 어풍이라고 어느 작가가 옆에서 말했다.

작가는 악마다.


영진의 꿈은, 갱도에 갇혀 겨우 살아났지만 폐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던 소년가장 시절로 돌아가면 앞뒤가 좀 맞아 들어간다.

이건 타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정작 일자 영진이 배우의 꿈을 키우고 고향을 떠나온 진짜 이유는 부와 명예도 아니요, 밑바닥의 삶을 벗어나는 신분상승의 꿈도 아니요, 화려한 무대의 조명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건 단지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었다. 배우라면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알고 깨치고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 세상을 바라볼 터이니 삶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30년 혹독한 무명생활은 그의 영혼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피폐해진 그의 삶은 형벌이자 고문이었고 숨 쉬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작가에게 영혼을 팔았다.


삶의 의미를 알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지.

그 두 가지가 뭡니까?

전지 그리고 전능.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이 능하면 그건 인간이 아닌 신입니다.

그렇지. 불완전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절대로 알 수가 없지. 영혼을 다오. 내 너에게 이 두 가지를 주마.

이미 썩은 영혼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영혼이지.

좋습니다. 내 영혼을 작가님께 바칩니다.


거래가 성사되었다.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영진의 의지에 따라 물고기가 살아나 파닥거리고 다시 풍경이 되어 바람에 흔들리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지상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이 작은 지구, 사람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네가 정의라면 제발 거짓말은 하지 마라.

전능하고도 전지 하다. 모든 것을 알겠다.

하지만 추락한다. 여전히 삶의 의미는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가져보자. 부귀영화를 누려보자. 사랑도 해보자. 저 하늘의 별처럼 최고의 스타 배우가 되어 내 미천한 신분을 상승시키고 만인의 연인을 내 아내로 만들자. 모든 것이 가능하니 단숨에 탑배우가 된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니 아이를 낳고 사랑과 헌신으로 키워 이 나라의 주역으로 만들자.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허망하고도 허망한 것.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화려한 날은 갔다. 눈부신 날은 끝났다.

부귀영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사랑은 덧없고 덧없는 허망한 찰나의 달콤한 꿈. 개망나니 자식은 술에 취해 아버지를 발로 차고 그의 아내는 돼지 같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젊은 놈에게 엉덩이를 흔든다.


더 이상 살아 무엇하리. 유서도 의미 없다. 아버지를 부서버린 폐쇄된 갱도 앞에서 허리띠를 풀어 나뭇가지에 묶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천사들이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내려와 합창한다.


영진아 영진아 영원한 진리 영진아 아직도 모르겠어?

삶의 의미는 마음을 전하는 곳에 있어.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과정이니까.


천사들이 알려주었다. 이때 영진의 나이 100세다.


영진이 나이 100세가 되어 마음을 전하는 곳 석탄가루 날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을 안아 준다.

이제야 깨달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이다. 전에는 잊고 있었던 사랑,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소중함,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 삶의 의미 그 자체다.


나 이제야 알겠노라. 세계의 현자들이여 들어라.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다. 자유든 사랑이든 생명이든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나 이제 삶의 의미를 알겠으니, 순간이여 영원하라! 지금 그대는 아름답도다.


온마을 사람들이 영진의 외침에 한달음에 달려와 갱도를 무너뜨리고 집을 짓는다. 깨달은 이가 왔다. 대현자가 나셨다. 영진을 위해 새 집을 지어 준다. 집은 화려하고 눈부시다. 하나의 성이다.


함께 합시다. 우리 함께 합시다. 우리 다 같이 미워하는 마음 없이 서로를 위해 동쪽으로는 태풍을 막을 단단하고도 높은 성벽을 세우고 서쪽으로는 우리의 농작물을 해치는 멧돼지 넘어오는 길을 차단해 그 길로 대수로를 만듭시다.


사랑이여라 사랑이여라. 어하 둥둥 사랑이여라.


영진의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삽을 들고 노래하며 일한다. 영차영차. 그들의 얼굴은 밝다. 그들의 노래는 환희의 찬가다.


천사들이 빛과 함께 내려와 합창한다.


사랑이야 사랑이야. 언제나 사랑이야. 어제도 사랑이고 오늘도 사랑이고 내일도 사랑이야. 무조건 사랑이야. 환대하고 환대해.


영진이 감격에 벅차 올라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통곡한다. 울어 뱉은 피 도로 삼켜 울고 또 운다.


생이여 그토록 찬란하고도 눈부셨던 우리의 생이여! 어찌 알아야 할 때 알지 못하고 잃고 나서 후회할까 찬란한 생이여!


그의 생 마지막 울음이었다. 영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새카맣게 막혀 있고 귀에 흙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게 파인 땅으로 관이 내려간다.

마을 사람 한 명이 삽으로 흙을 떠 관뚜껑 위로 흝뿌렸다. 관뚜껑 위로 흙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쌍한 놈. 스물 하나에 병든 아버지 혼자 모시는 것도 서러운데 아사가 뭐여 아사가.


남자가 호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꺼내 관뚜껑 위로 던지고는 삽을 들어 흙을 퍼 내린다.


세상 천지 너같은 효자가 또 어디 있겠냐. 저승길 노자돈이나 해라. 굶지 말고!


관뚜껑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흙은 점점 더 높이 쌓여갔고 하나의 무덤으로 완성되었다.

무덤은 그의 성이다. 마지막까지도 들린다.

찬란한 사랑의 노래가.


무덤 위의 꽃.

꽃다운 스물 하나,

영진 이곳에 잠들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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