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이 글에 사용된 소재의 일부는 위버멘쉬작가님께 허락을 받고 일상소곡집 Part3과 Part5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노태우 정권 말, 1993년 초반은 군부중심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에 가장 둔감한 사람들은 기득권 그 언저리에 위치해 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폭력수사와 강압수사는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검찰수사관 김가영은 그들 세계에서 열쇠로 통한다.
그 어떤 흉악한 피의자도 그녀 앞에만 앉으면 순한 양이 되고 경찰 조사에서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던 말이 네, 맞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인정합니다. 서명을 날인까지.
이렇게 180도로 뒤바꾸는 초능력을 지녔다.
범죄자의 잠긴 입을 여는 진실의 열쇠. 그것은 마법도 아니고 초능력도 아니었다.
가영의 고민은 늘 범죄자들의 교화와 갱생에 있었다. 사람은 바뀐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저 남들이 보는 표면적인 범죄의 현상을 찢어발겨서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이면에 감춰진 것을 들여다보았고 어쩌다 이 분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것에 주목했다. 그러면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참 슬프고 안타깝고 딱하다. 거기에 그녀가 가진 최고의 초능력. 경청의 대화기술은 피의자들의 꽁꽁 얼어붙어 있던 차가운 마음을 봄날 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몽키스패너로 어린 아이의 머리를 때려 구속된 피의자, 아무도 없었는데 조선족 세 명이 위협해서 칼을 휘둘렀다고 우기는 멀쩡하게 잘생긴 아저씨 등등.
경찰조사에서는 바락바락 우기던 이 사람들도 그녀 앞에만 앉으면 마음을 열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녀의 취조과정을 옆방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부장검사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잘해. 정말 잘해. 보통이 아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신기해. 저 할아버지도 곧 슬슬 불고 자백하겠네. 서명할 시간이 다 됐어. 나는 집에 갈 시간이 다 됐고.”
부장검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퇴근준비를 서두른다.
가영은 예쁜 소품 들을 좋아했고 직장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면 자신의 외모라든지 겉모습에 신경을 쓸 법도 한데, 그녀는 딱히 남들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할 일만 소신껏 열심히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평온한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발생한다.
“김수사관. 공문 하나 보낼 테니까 확인해봐.”
“뭔데요?”
“직접 확인해봐. 나도 뭐라 말 못하겠어. 어쨌든 자네 선택이야.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 대답만 확실하게 해줘. 답변공문은 내가 보낼 테니까.”
수사업무 협조요청. 공문서 00호.
발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수수사 제1과장 이병헌.
안녕하십니까? 김가영 수사관님. 저는 국가안전기획부...
공손한 인사를 시작으로 작성된 공문서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 수사업무 협조에 관한 요청 건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마약과 살인 그리고 뇌물혐의의 피의자가 도대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의자 수사에 수사관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과 그 능력은 저희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장님!”
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검사실 문을 확 열고 소리쳤다.
부장검사가 화들짝 놀란다. 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의 표정이다.
“이 사람 저 어떻게 알아요?”
“그게...”
술자리에서 안기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자기한테 이런 유능한 수사관이 있다고 막 자랑했다고 한다. 그런 뒤로 이런 공문이 날아 왔다고.
“아 진짜!”
“워워.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바로 공문 보낼게. 보낸다?”
가영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삶의 균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가안전기획부 별관지하.
가영이 안기부직원의 안내를 받고 따라 내려간 곳은 철문이 열리자 피비린내가 가장 먼저 진동했고 습했으며 그 습한 공기에는 라면냄새와 소주냄새 그리고 담배냄새까지 뒤섞여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때 묻은 하얀 팬티만 입은 채로 돼지 바비큐처럼 매달려 회전에 따라 물에 얼굴이 잠기는 고문을 당하고 있는 피의자까지.
인권이란 것이 있다.
범죄사실이 밝혀지지도 않은 피의자를 상대로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감금에 강압수사에 폭력수사다.
시대가 바뀌어나가고 있다. 몇 달이 지나면 대선을 통해 문민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한데, 안기부 이놈들 아직도 이러고 있다니.
“서울중앙지검 김가영 수사관님 오셨습니다.”
가영을 안내한 직원이 철문을 닫고 나간다. 잠깐만, 문소리가 잠긴다.
가영이 고개를 돌려 들어온 입구를 보다가 다시 매달린 피의자를 보았다.
“당신들 뭐야? 저 사람 당장 풀어줘!”
“김가영 수사관님?”
건달인지 마약중독자인지 형사인지 모를 한 남자가 그녀를 불러놓고는 소주병을 들고 물처럼 꿀꺽꿀꺽 마신다.
“네. 서울중앙지검 김가영 검찰수사관입니다. 업무협조요청 건으로 왔고요. 하지만 이건 아니네요.”
“뭐가요? 뭐가 아닌가요? 이 새끼요? 지금 이 새끼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남자는 가영이 보는 앞에서 매달린 피의자의 성기를 소주병으로 툭툭 친다.
“그만하세요.”
“사람을 죽인 놈이에요. 마약청정지역인 이 나라에 10키로 분량의 히로뽕을 풀었고요.”
“그건 법정에서 밝혀질 일입니다.”
“그러니까 증거를 찾아야죠. 아니면 자백이라도 받아 내야하고요.”
“강압, 폭력수사에 의한 자백은 인정받지 못해요. 그만하세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잠깐만요. 수사관님. 지금 저 돼지새끼가 불쌍해요?”
“돼지새끼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그럼 나는 뭐로 보이나요?”
“당신이 더 범죄자 같네요. 관등성명 대보세요.”
“아이고 네.”
남자가 뮤지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영에게 인사를 한다. 담배를 꼴아 물더니 후! 하고 가영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인천서부지구 강력계 형사 정해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수사관님.”
남자가 킥킥거리자 가영이 숨을 고르며 주위를 다시 돌아본다. 2명의 남자가 더 있다. 정장차림을 보니 안기부직원들이 맞다. 그러면 공문을 보낸 자는?
바로 그 때다. 잠겼던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아이고 수사관님 오셨습니까?”
공문을 보내온 자다. 안기부 특수1과장 이병헌.
“이거 제가 미리 와 있어서 수사관님께 설명을 좀 드렸어야 했는데 오는 길에 차가 빵꾸가 나서 그거 손보다보니까.... 인사들 했어? 야 이 녀석들아? 인사했냐고?”
네
안기부직원 두 명이 건성으로 대답한다.
“과장님 피의자 저렇게 대하면 안돼요. 일단 먼저 풀어주세요.”
가영이 정해인을 보았다. 저 수염만 없으면 아직 어린 녀석이다. 독기로 가득한 눈매도 뭔가 큰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수사관님 제가 설명을 쭉 드리겠습니다.”
“밖에서 듣죠.”
“아. 못나갑니다.”
“네?”
“서명을 해줄 때까지는 못나갑니다.”
“뭐요? 이런 미친!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
가영이 참고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정해인이 키득거리며 웃더니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가영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 철문을 잡아 열었다. 꼼짝도 하지 않으니 발로 찬다.
“이거 열어!”
정해인이 양쪽 어깨를 으쓱한다. 사람 놀리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해인 형사. 저 눈가의 독기와 수염만 없으면 예쁜 남자다. 무엇이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이병헌이 계단 밑에서 가영을 올려다보며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자자. 이리 와서 얘기 더 들어보세요.”
“더 들을 말 없어. 당장 문 열어. 이거 감금이야. 감금죄에 대해 설명해줘?”
“아휴, 잘 알죠. 근데요 수사관님. 감금죄보다 여기 정해인 형사 아내와 딸이 저 돼지새끼한테 어떻게 죽었는지 지금부터 제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요. 그걸 듣고 저 돼지새끼는 무슨 죄가 적용되는지 그것부터 설명 좀 해주시렵니까?”
“네?”
가영이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정해인이 가영을 보지 않았다. 정해인이 한숨처럼 내뱉은 담배연기가 전구를 휘감는다.
“이놈 배후에 이경영의원이 있습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대통령이 될 김영삼의 최측근 이경영이요. 이 돼지새끼의 주인. 마약카르텔에 성폭행, 살인사주까지. 우리 안기부가 뭐 예전처럼 아직도 멀쩡한 학생들 붙잡아 때리고 간첩 만들고 그러는 줄 아시나본데요. 우리 이거 해결 못하면 영원한 불명예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겁니다.”
“이경영의원이 그렇다는 증거가 있나요?”
“여기 이만큼 확보되었습니다.”
“그거 다 불법수사로 확보한 거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진실입니다. 제 모가지 걸게요. 해인이 저 친구! 이경영의원 수사하다 소중한 사람 잃었고요! 저 역시!”
“에이 씨발 그만해! 그냥 돌려보내!”
정해인이 소주병을 던져버린다. 가영이 계단을 밟고 다시 내려왔다.
“일단 풀어줘 보세요. 제가 얘기 좀 해볼게요.”
매달려 있던 피의자가 풀려나 가영의 앞에 앉았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이래서는 피의자를 감화시키는 그녀만의 초능력 경청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눈빛을 보면 안다. 이 피의자는 여전히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정해인 형사를 보려고 얼굴을 돌렸는데 퉤! 하며 침이 날아와 붙었다.
냄새가 고약했다. 피냄새와 똥냄새까지 섞여 있었다.
가영이 그 침을 닦지도 못하고 피의자를 보는데 킬킬 거리며 웃는 그는 진정 악마였다.
눈앞이 노랗게 보인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증세가 밀려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정해인 형사가 피의자를 두들겨 패면서 소리쳤다.
돌려보내. 보내 드리라고!
그 목소리가 꿈처럼 들려왔다. 철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가영은 속의 것을 모두 다 토해내고 말았다.
철문이 닫혔다.
돌아가면 그만이다. 돌아가면 좋아하는 예쁜 소품을 사모으고 부장님께 칭찬 받고 동료들이 사주는 밥을 마다하지 못하는 척 살아간다.
그러면 된다. 하지만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저들이 원하는 서명은 이 모든 과정에 불법은 없었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의 서명. 폭력의 공범이다.
폭력의 서명 Part2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