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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May 15. 2016

[책] 박민규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진짜 패배'의 순간은 언제인가

그날 밤 나는, 낡고 먼지 낀 내 방의 창문을 통해 – 저 캄캄한 어둠 속에 융기해 있는 새로운 세 개의 지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들이었고, 각자가 묻힌 지층 속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보았다. 꽤 노력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수치와 치욕을 겪으며 서민층에 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무진장,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하면서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중산층에 파묻혀 있는 수많은 얼굴들을. 그리고 도무지 그 안부를 알 길이 없는 – 이 프로의 세계에서 방출되거나 철거되어 – 저 수십 km 아래의 현무암층이나 석회암층에 파묻혀있을 수많은 얼굴들을, 나는 보았다.

물론이지. 우리는 미국의 프랜차이즈니까. 언제나 이 점을 잊어선 안 돼.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박민규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6점


작가는 예리했다. 아니, 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실패의 대명사를 통해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중학생의 이야기를 넘기면서 나는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책장을 넘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오롯이 야구라는 플랫 한 주제로 인생이라는 변화무쌍한 주제를 그려내는 작가의 입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의 통찰력은 ‘나’가 ‘그녀’와 의미 없는 잠자리를 가지면서 (다소 건조하게 그려지는 삽입과 정사가 성인으로 거듭나는 의식이자 정신적인 성숙함+어른다운 인생을 위한 냉소를 획득하는 계기인 것처럼 그려졌다.) 빛을 바랐다. 독특함과 기교에 신경을 쓰는 나머지 주인공의 주된 감정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개연성을 잃었다.

 가장 최악은 자신의 주제의식을 막판에 상실했다는 데 있다. 작가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시선, 경쟁과 착취, 사회에서 주입된 획일화된 성공에 대한 환상에 대한 냉소에서 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개인의 가치관, 삶의 방식에서 해결책을 찾는 결말은 너무나 힘없고 초라하고 비현실적이다. 주인공과 서브주인공 둘 다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삶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망설임 없이 그들의 가치관을 개조한다. 사회와 구조에게 대거리 한마디 못하고!!  그것은 아주 낙낙하고 평화로운 삶이긴 하지만 결코 반항적이지 않으며 희망적이지도 않다. 꿈, 꿈을 찾는 여정이라고 보기에는 참담한 실패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구조 자체에 고민 없이 진입했던 자신이 문제라는 식으로, 그는 기꺼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벗어던진다. 벗어던진다. 아, 그 얼마나 통쾌한 단어인가!

그러나 결국 그가 뒤돌아 향한 곳은 어디인가. 자신의 자리. 그곳은 정말 삼미 슈퍼스타즈의 자리인가? 평범함과 실패, 억척과 끈기 사이에서 갈 곳을 잃은 그가 그래서 안쓰럽다. 불편하고 부끄럽다.

 그는 사랑을 용기 내지 못한 만큼 사랑과 성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허무의 감정에 사로잡힐 때 스스럼없이 성을 사고파는 것이 평범한 사내의 순정이라는 그런 고루한 서술에서 나는 작가의 한계를 보고 말았다. 아, 그리고 ‘나’는 굴지의 대기업에서 퇴직한다. 선택이 아닌 강제된 퇴직이지만 그는 자신이 퇴직한 순간 비로소 인생의 주체가 된 것처럼 서술했다. 아니 정말은 그때였다. 그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 악다구니를 쓰고, 불평하고, 행동하지 않는 ‘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참여할 권리를 잃었고 모든 상실과 착취는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로 내려앉고 만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인공은 심정적으로 행복해졌다지만 이것이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뜻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아주 씁쓸하다. 작가의 의도는 잘 알겠으나 그의 의도, 서술, 결말 전체를 부정하고 싶은 경우는 드물기에 더욱 그렇다. 그의 뒷심이 조금 더 강했다면 좋았겠지 싶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아주 재밌다.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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