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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Feb 20. 2017

가까운 이별

당신이 읽더라도 상관없는 일기(1)

이별을 수집하는 일기를 쓰는 이유는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나 때문이다.

나는 의지 혹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서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연락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 역시 사람인지라 과거를 미화하고 나 좋은 대로 이별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일기는 오늘의 기분을 남김없이 인정하고 확인해서

언젠가 이 기억이 필요할 때 요긴히 쓰이도록,

그리고 그때는 그랬었지 하고 하하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너에 대한 마지막 기록




잘 모르겠는 건 이 이별의 첫 단추를 누가 끼웠느냐 하는 문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이별의 빌미를 이기적이고 무뚝뚝한 내가 여리고 착한 그에게 제공했던 건 아닐까,

그는 상처를 받고 받다가 지치고 아픈 마음에 이별을 고했던 건 아닐까.'

이렇게 이별의 시작을 내가 먼저 시작했다고 후회 또는 반성 비슷한 걸 하는 건 그냥 그런 거다.

그냥

내가 덜 비참해지려고 하는 자기 위안 같은 거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은 관뒀다.


두 번째로 잘 모르겠는 건 이다지도 갑자 사람 마음이 변할 수 있는가 하는 거다. 하지만 나는 이것 역시 안다.

갑자기가 아니라 천천히 변했대도

그의 마음이 하지 않은 것으로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마음의 속도를 일상의 속도로 이해하려고 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않은 일이므로

나는 이 생각도 곧 관뒀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니, 먼저 아주 오랜 침묵이 있은 후에 결론부터 말해줬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듣고 싶었던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세 번째 잘 모르겠는 건 슬픔과는 다르고

그리움이나 사랑 같은 것과도 다른,

막 뭐가 막 우습다가도 탁 하고 울음이 나올 것 같은 이 이름 모를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거다.


이 감정은 분명 슬픔이나 아쉬움보다도 모든 걸 망쳐버린 배신에 대한 참담함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이것도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그를

믿었다.


믿었다는 말이 이토록 한 자 한 자 힘겹게 쓰일 것을 나는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나는 나의 믿음을 여러 개로 나눠놓고

'그'에게는 딱 하나를 건네고 나머지는 나도 잘 모르는 곳에 던졌다.


그렇게 나의 온전한 믿음을 유기하고 나면

이별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언제나 이별은 믿음의 크기 비례해서 아픔이 되었다.


이건 원칙이었다.

사랑하되 사랑을 믿지 않을 것.

사랑을 냉소로 바라볼 것.

행복한 연애의 나날이 아무리 흘러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내 연애의 바이블이자 지침서였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그 원칙을 깨고 멍청하게 내 유일하고 온전한 믿음을 그에게 줘버렸다.

그의 사랑이 이유도 조건도 시작도 끝도 없는 '맹목적인'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만데서

오늘의 이별은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나는 '그'의 사랑이 기간의 제함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이유란 것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입에서 이별을 확인했을 때 충격받았던 것은

전제가 바뀌지 않아도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사랑하던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의 사랑은 변하는구나


그 후로 내가 믿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다.

그는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유도 조건도 시작도 끝도 없는 사랑을 맹세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 같은 건 굳이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생겨나는 것뿐

사랑하는 이유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 나는 유일한 운명, 안식처, 무한한 사랑의 목적지였다. 아니, 

나?


우리는 서로의 약점과 모자람을 알고도 그래서 더 사랑했다.

우리가 꿈꾼 것은 사랑의 완성과 결실

그래 나는 그에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혹은 주고 있는지 잘 모른 채 '맹목적으로' 사랑받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입에서 이별을 확인했을 때 내가 충격받았던 것은

이번에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이었다.


또다시, 네가 사랑하던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의 사랑은 변하는구나


정말로 그렇다.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도, 스물일곱의 나도

믿음을 배반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고, 아프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오직 사랑만 변했다면

그것은 나를 탓할 것이 아니라 변한 사랑을 탓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아직도 남은 이 사랑, 동시에 깨어진 믿음을 애써 내치지는 않으려고 해

처음엔 믿음의 파편이 너무 날카로워서

나까지 조금 뾰족해지겠지만

걔들을 가까이 두고 걔들이 일상에 닳아 조금씩 작아 없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싶어

가까운 이별이 멀어질 때까지.


대신에 나를 탓하지 않으면서 잘 지낼게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잘 하고, 술은 줄이고, 시험도 올해 꼭 붙을게


이제와 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어

나에게 주었던 그 모든 것에 계속 감사할게


아까는 정말 미웠는데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너를 미워하지는 않기로 했어.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너의 사랑을 조금만 탓하다 말게.


잘 지냈으면 좋겠어

사랑했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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