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토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가복음서 14:10-11)
“두껍아 두껍아 새 집 줄께 헌 집 다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라, 나 어릴 때 어른들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뭔 이런 흥정이 다 있을까요? 듣는 두꺼비도 기가 찹니다. 바닷가에 놀던 꼬마들이 하도 헌 집 줄 테니 새 집 달라고 노래를 노래를 해서 준 적은 몇 번 있지만. 다 큰 어른들이 그 좋다는 새 집이 싫다고, 새 집 줄 테니 예전 살던 헌 집 달라고, 그 헌 집으로 나 돌아가겠다고, 모여 저렇게 싸움하겠다 노래를 하니, 참 난감합니다. 두꺼비의 입장에서야 딱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되나 싶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시정잡배들의 그런 말도 되지 않는 흥정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들은 정말 그랬습니다.
여기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영원히 머무실 새 집을 지으라고, 가서 그 헌 집은 그만 허물고 새 집을 지으라고, 아예 가서 그 새 집이 되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런데 정작 저들은 여태 살던 그 헌 집이 좋다고, 우리 그냥 여기 계속 살게 해주세요, 그 헌 집 조금 손보고 고쳐서 살 테니, 우린 굳이 새 집 필요하지 않으니 그 고칠 돈이나 좀 어떻게 달라고, 거기 저렇게 모여 작당 중입니다. 흥정 중입니다.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도 흥정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집도 흥정의 대상입니다. 신앙도 흥정의 대상입니다.
나는 악을 지켜보지 않지만, 악은 늘 나를 지켜봅니다. 악은 그 얼굴을 숨긴 채 너무 평범한 얼굴을 하고 나에게 다가옵니다. 자기 속내는 드러내지 않고, 대신 나의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나의 안에 그리고 나의 밖에 그 아무것도 아닌 듯 별거 아닌 듯 ‘누구나 다 그렇지, 누구나 다 그래’ 하며 살짝 들킨 나의 속내, 그 작고 소박한 악의 불씨는 없는 듯, 그러나 꺼지지 않아 비 온 뒤의 죽순으로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있어 자라고, 언제든 나를 제대로 그 악에게 넘겨줄 그 기회를 엿보며 커다란 대나무가 되길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나 둘 자라 대밭이 되면 손을 쓸 기회도 없는데.
악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밖에도 그리고 안에도 있습니다. 오히려 적은 내부에, 배신은 내 안에 더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있습니다. 아니, 열두 제자 가운데 둘로, 셋으로, 때로는 열하나로 그리고 열둘로 있습니다. 악은 나와 함께 먹고 자고 걷고 살고 그러면서 있습니다. 그러다 물 들어온 뒤 논밭처럼 물렁해지고 말랑해진 그 틈과 사이에 여백처럼 있던 악의 마음이 스며 듭니다. 나를 꽉 채웁니다.
나도 모르게 예수님 넘겨줄 그 마음, 예수님 믿는게 예수님 따라 사는 게 재미없다 의미없다 실망이 크다 얻는 게 없다 왜 나만 그럴까 그러니 이제 조금 힘이 든다 조금 쉬었다 가면 안될까 조금 여기 있다가 가면 안될까 나중에 다시 따라 가면 안될까, 그 마음 조금 들까 싶은, 그 마음 조금 품었을까 싶은, 바로 그때.
‘옳다구나!’ 악이 기뻐할 그때는 왔으니, 때로는 속삭이듯 조심조심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고, 때로는 반듯하게 친절하게 다가와 내 다 안다 위로의 눈길 손길 주고, 때로는 그게 뭐 그리 망설여야 할 일이냐며 무한질주의 본능으로 거침 없이 내게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약한 마음, 못된 마음, 악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늘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육신도 약한데, 마음까지 약하구나! 깨어 있어라! 기도하여라! 세상 끝 날까지 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나의 영이 너와 함께 항상 있을 것이니, 너의 안에서 소란한 마음이 들거든, 너의 밖에서 요란한 마음이 들어오거든, 깨어 기도하여라! 그런 마음이 조금 들거든, 자꾸 들거든 더 깨어 기도하여라! 너의 그 깨어 있는 중에, 너의 기도하는 중에 나 있으니, 염려는 하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여라!”
가룟 유다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의 길은 그리 낯선 길,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얼굴도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걷다가 문득 생각나기도 하고, 마주치기도 하는 얼굴입니다. 숨는다 숨어도 보이는 얼굴입니다. 가린다 가려도 자세히 보면 아는 누구의 얼굴, 혹은 모르는 누구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거울에서도 봅니다. 거기 누가 나를 봅니다. 화들짝, 아이구 깜짝이야!
“. . . (임금이)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 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묻기를,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 . . .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복음서 22:8-13)
그러면 나 안되는데 . . .
그래서 신앙의 선배인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14)*
새 옷을 입고, 새 길을 가고, 새 집으로 이사하는 사순절입니다.
* 갈라디아서 3:27, 요한계시록 3:5,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