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성주간 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5)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14:18-21)
“우리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까?” (참조, 9:34)
제자들은 줄곧 눈치게임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점점 가까워 오자 더는 남들 눈치를 볼 여유가 없는지, 아니면 남들이 주는 눈치에는 더 이상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눈치가 남들보다 오히려 더 있는 건지.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1’을 외치며 손들고 나섭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10:36-37)
아니나 다를까,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옆에서 이것을 듣고 분개합니다. 저들이 게임의 룰을 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9-10)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제 그 긴 여정의 끝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혈입성.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권력의 이동, 교체. 우리에게 이젠 더 이상의 눈치게임은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 한 명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눈치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밑도 끝도 없는 이 한 마디로 제자들의 눈치게임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입니다!’ 하며 손들고 앞으로 나설 수도 없고, ‘나는 아닙니다!’ 하며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눈치 너무 있어 그냥 묵묵부답 듣지 못한 척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치 없이 먼저 나설 수도 없고. 이건 정말 제대로 눈치게임입니다. 짧만 긴 침묵. 가장 눈치 빠른, 혹은 가장 눈치 없는, 혹은 아예 이런저런 눈치 보지 않고 아무 생각 없는, 그 ‘1’을 먼저 외칠 제자는 누구일까?
“그게 나입니까?”
“혹시 나입니까?”
“설마 난 아니죠?”
“나는 아니죠?”
제자들의 말이 나는 아니라는 걸까요, 나는 아니고 싶다는 걸까요, 아니면 나는 아니어야 한다는 걸까요? ‘넌 그럴 놈이 아니다, 너는 이제 곧 나와 함께 높은 자리에 오를, 나의 옆자리에 앉을, 나의 첫째가는 제자다’ 그런 어떤 확인이라도 받고 싶은 걸까요?
‘혹시 . . .’ 하며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던 마음, ‘설마 . . .’ 하며 왠지 모를 걱정으로 물렁해지고 약해지던 마음, ‘그렇지만 . . . 그래도 . . .’ 하며 왠지 모를 의심에 스며 젖어 드는 은밀하게 악해지는 마음, 그 나의 마음들을 다잡을 수 있도록 ‘그래 넌 아니다, 넌 그럴 제자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걸까요?
‘나는 아니다’ 하면 될 것을, 왜 제자들은 ‘그래 너는 아니다’ 라는 그 답변을 기다릴까요? ‘아니다’ 그렇게 왜 강한 부정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나는 아니죠?’ 왜 제자들은 저리 조심스럽게 저리 수동적으로 물을까요?
“누가 배신자입니까?”
“도대체 그 놈이 누굽니까?”
왜 제자들은 확실하고 똑 부러지게 묻지 않을까요? 왜 적극적으로 그게 누구냐고 묻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나도 아니고, 여기 우리 모두도 아닙니다!”
왜 강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할까요?
자기들 중에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지, 그런 낌새를 오래 전부터 나는 느꼈었다는 건지, ‘혹시’ ‘설마’ ‘그렇지만, 그래도’ 하는 나의 속내가 들켰다 여겨서 그러는 건지. 제자들은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합니다. 근심합니다. 걱정합니다. 불안합니다. 안절부절못합니다.
왜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아는 것은 이들 중 한 명은 그 예수님을 넘겨 주고, 나머지 제자들은 직접 가담자는 아니라 할 지언정 구경꾼, 방관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50보 100보입니다.
동료 제자들 중의 한 명인 유다가 그 총대를 맨 것일 뿐. 그게 나가 될 수도, 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중 누군가는 될 수 있다고 제자들은 생각을 해 왔던 것일까요? 항상 그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 배신의 가능성, 그 배반의 여지 늘 나의 안에, 너의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에 있어 왔다는 것일까요? 그 문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든 한 발만 그 안으로 슬쩍 밀어만 넣으면 된다는 것, 참 안타깝고 슬프고 또 무서운 일입니다.
거기 예수님의 못난 제자들. 우리는 그게 나였을 수 있다는 생각, 그게 지금 나라는 생각, 그리고 그게 앞으로도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는 듯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거기 가룟 유다. 과거의 나였을 수도, 미래의 나일 수도, 그리고 현재의 내가 지금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신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성경 속 남들 이야기로, 그냥 한 구절로 읽고 덮는 것은 아닐까요? 모르는 척, 듣지 못한 척, 보지 못한 척. 그냥 빈 무덤 그 십자가의 부활로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을 공모하고 또 실행에 옮기는 주도자 혹은 적극 가담자는 아니어도, 자세히는 모르는 그저 이렇게 저렇게 돕는 단순 가담자는 아니어도, 지나가다 슬쩍 무심한 듯 무관심 속 보고 지나치는 행인이나 구경꾼으로, 혹은 극장의 관객으로 책의 독자로 보고 듣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편해지는 사순절 마지막 일주일, 성주간(聖週間)입니다.
이 불편함을 넘어 부활의 평화는 찾아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