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성주간 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6)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 . .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 . .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 . .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 . .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 . . 유다가 와서, 예수께로 곧 다가가서, ‘랍비님!’ 하고 말하고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다. . . .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마가복음서 14:32-52)
죽자 사자 너도 나도 서로에게 달려드는 세상. 나 살자, 나라도 살자, 이왕 이렇게 된 것 너 죽고 나 살자, 서로를 힘껏 치받는 세상. 그렇게 되어가는 세상이면 참 무섭습니다. 그건 나만 아니면 되고, 이건 나만이어야 하고, 정욕과 탐욕과 이기(利己)와 악의 공을 한껏 위로 치받아 올리고, 솟구치는 그 공에 나를 실어 공중으로 한 없이 오르고 올라, 이내 자갈밭에 떨어져 어디로 튈 줄을 모르는 세상이면 더욱 무섭습니다.
그 하는 양을 더는 보지 못하겠다, 너는 살고 나는 죽으려 하니 이제 그런 세상 그만 살라 하시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너희가 힘껏 올린 그 공을 대신하여 나의 몸과 맘 거기 온전히 실을 테니, 너희는 그 공에서 그만 내려오라, 너희는 그 공에 네 몸과 맘 그만 실어라, 너희는 그만 공중으로 그 공 높이 쳐내는 짓 멈추어라, 이제 그만 해라 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그 돌밭에 떨어져 산산히 부서지기 전에 받아 안아야 할 제자들이, 미안하다 말 없이, 나 살겠다 죄다 꽁무니 빠지게 달아납니다.
스승은 나몰라라 도망치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예수님은 참 슬픕니다. 어처구니 없으나 체념하신 듯 그러려니, 하지만 서글픈 예수님. 제자들 도망치는 꼴도 그렇고, 홀로 남겨진 그 제자들의 스승의 모양새도 그렇고. 쓸쓸하고 외롭고 또 슬픕니다.
설마 내가 그 배신자는 아니죠?
설마 내가 먼저 배신하는 건 아니죠?
설마 내가 먼저 도망치는 건 아니죠?
내가 배신한 그 사람이 아니라 다행일까요? 내가 제일 먼저 배신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일까요? 제일 먼저 도망치는 사람들 중에 그나마 내가 없어 다행일까요? 그래도, 난 맨 나중에 어쩔 수 없어 도망쳤으니, 그저 도망가는 동료들을 따라서 그랬을 뿐이니 다행일까요? 아님, 내가 그때 거기에,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일까요? 거기에 있었다면 난 저들처럼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배신이나 하고 도망이나 치고 그러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 참 다행일까요?
“그 넘겨줄 자가 난 아니죠?” (14:19)
“설사 말씀하신 대로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난 절대로 스승님을 모른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4:29, 31)
말은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라도 도망칠 수 있었음에 다행이다 합니다. 그나마 생명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음에 참 다행이다 합니다. 비록 너는 죽는다 해도 나는 지금 살아 있으니 그래도 너무 다행이다 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음에 다행이다, 감사해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할까요?
그런데, 거기 홀로 남아 계신 스승 예수님은 어떻게 하고, 저기 제자들은 누구에게 감사해 하며 앞으로를 살아가야 할까요?
“난 아니오, 난 그 사람을 모르오!”
닭 울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베드로의 그 통회의 눈물을 그저 한 못난 사람의 후회이고 아픔이라고 나는 쉽게 나의 두 눈 꾹 감을까요?
“그러진 말았어야 했는데,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겼으니 이제 난 이 죄를 어떻게 할까?”*
참회와 회개와 회복의 그 기회 조차 놓치고, 극단적으로 사라져 간 유다를 마냥 대놓고 나쁜 놈, 악한 놈이라고 나는 실컷 욕을 할까요?
“아이고 나 살려!”
홑이불도 버리고 정말 알몸으로 모양 빠지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제자를 저런 창피한 놈, 부끄러운 놈이라고 나는 혀만 끌끌 찰까요?
“그래 난 다행이다, 내가 거기에 없어서, 내가 저들이 아니라서, 내게 저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난.”
지금 여기 있는 나는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데,
거기 홀로 남은 자의 그 슬픔, 그리고 저기 홀로 남겨두고 떠난 자들의 그 부끄러움을 나는 어찌할까요? 그 아픔을 여기 나는 어찌할까요?
이 모든 슬픔과 부끄러움과 아픔,
고스란히 담아 사순절의 끝을 향해 함께 걷습니다.
* 마태복음서 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