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부정 사이,
그 어디쯤에 서 있는 나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by 교회사이


사순절 성주간 수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7)


“. . . 대제사장이 예수께 물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 . .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 . .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마가복음서 14:53-72)


The Taking of Christ, Caravaggio (1602), Dublin, National Gallery of Ireland.jpg The Taking of Christ, Caravaggio (1602), Dublin, National Gallery of Ireland


“그대가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인가? 당신도 그 예수와 한패인가?”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동시 묘사 同時描寫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사건, 그러나 다른 두 공간, 다른 두 장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플래시백으로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한 장면이 끼어듭니다.


두 장면이 한 오페라 무대 위에 병치(juxtaposition)되어 오른쪽 무대와 왼쪽 무대에서, 혹은 위쪽 무대와 아래쪽 무대에서 동시에 펼쳐집니다. 한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각각 레치타티보로 전개되는 두 장면이 마치 하나로 보이고 들립니다. 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불협화한 듯 보이는 두 장면이 하나의 사건으로 협화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회상의 장면까지 뒷 배경 막에 나타납니다. 이젠 아예 세 장면이 교차 편집되어 대조와 대비를 통해 빠르게 전개됩니다. 무대 위에 두 장면이 그리고 배경 막에 한 장면이 잠깐씩 차례로, 때론 동시에 펼쳐집니다. 정교하게 연출되어 장면들이 서로 엇갈리다 마주치고 또 마주치다 엇갈리고를 반복합니다. 동시성입니다. 사건의 긴박감을 줍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이 세 장면을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비장미를 더합니다. 보는 이의 긴장감을 최대한 끌어올립니다.


예수는, 그리고 베드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가 될까?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그 사이에 인터미션(intermission), 휴지기休止期)는 없습니다. 아주 잠깐의 휴지부(休止符)도 없습니다. 숨고르기 없이 그 끝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한곳에 다 모였습니다. 그 당대의 권력자들 한가운데 당당하고 위엄있게 서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 뒤에서조차 끝 간데 없이 쪼그라들고 초라해져 고개를 숙인 제자 베드로가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네가 말한 그이가 바로 나다.”


“너는 예수와 한패인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긍정과 부정, 그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 그러나 다른 공간에 있는 스승과 제자의 슬픈 이중창입니다. 서로 보이는 벽을 사이에 둔 불협화(不協和)의 대비와 대조는 긴박감과 긴장감 속에 더욱 비애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곳이 제자들이 그토록 바랐던 승리와 영광의 자리였다면 분명 달라졌을 텐데. 개선하는 왕을 맞는 승리와 영광의 합창이 울려 퍼졌을 텐데. 제자들과 사람들로 꽉 찼을 텐데. ‘그분을 알다마다요. 내가 바로 그 첫째가는 제자, 베드로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제자들 중의 제자 베드로가 바로 나입니다’ 묻기도 전에 그랬을 텐데. 지금 이렇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여기선 차마 한 성질하는 베드로도 선뜻 앞에 나서질 못합니다. 못 배운 제자의 잘못일까요? 못 가르친 스승의 잘못일까요? 누구의 탓일까요?

늘 따라다니고 붙어다니던, 언제나 기세가 등등했던 리더격 제자도 모른다 외면받는 그 제자의 스승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제자 훈련에 철저히 실패한 스승은 외롭습니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분명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과 한패가 아닙니까? 당신은 저 예수를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까?”


“난 모릅니다. 그 촌구석의 나사렛 예수, 난 모릅니다. 고난과 고통, 그런 거 난 모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맞는 그 예수는 난 모릅니다. 부활의 주님, 승리와 영광의 주님은 압니다. 그 예수님은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 저기 초라한 뒷모습의 나사렛 예수는 난 모릅니다. 그 철저하게 실패한 예수라는 이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난 압니다. 초라해 보이고 쓸쓸해 보이고 슬퍼해 보이는 저기 나사렛 예수, 저분을 난 잘 압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저분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저분을 따라 나는 끝까지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나는 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사랑하는, 그리고 저분의 사랑을 받는 제자입니다.”


긍정과 부정 그 사이에 닭의 울음소리는 있습니다.

그 닭 울음 소리는 베드로뿐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정신이 번쩍 들게합니다.


The Denial of St Peter, Caravaggio (1610),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jpg The Denial of St Peter, Caravaggio (1610),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모욕과 치욕과 굴욕과 조롱 속에 홀로 서 계신 스승 예수, 살을 찢는 고문과 처절하고 참혹한 죽음을 목전에 두신 스승 예수, 그리고 겁에 질려 차마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거기 그 집 안마당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섰다 하는 제자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산다 하는 예수의 제자로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저 예수님을 안다고 대답할 자신이 있는가? 난 저 베드로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저 초라하고 실패한 예수님을 ‘난 모른다’ 부정하고, 그 닭 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닭 울음 소리에도 통회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나에게 있는가?


그게 아니면,


‘난 예수의 제자요, 난 그분을 잘 압니다’ 그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분을 긍정할 자신이 나는 있는가? 이 어둔 밤을 그분과 함께 지날 자신이 나는 있는가? 도망치지 않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곁에서 지킬 자신이 나는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밝아오는 아침을 빈 무덤에서 맞을 자신이 나는 있는가?




긍정과 부정 사이.


나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쩔 줄 몰라 앉지도 서지도, 그리고 오도 가도 죄다 못한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은 아닌지. . .


엉거주춤하는 사이,

저기 닭이 날 측은하게 쳐다봅니다.

그러다 날 샌다고,

그러다 곧 울겠다고.


내가 아니라 네가 울겠다고.



그래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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