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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15. 2022

버리다, 놓다, 끝나다.
그리고 어둠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성주간 금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9)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 . .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마가복음서 15:33-41)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분이 나를 버렸습니다. 나는 그분을 놓았습니다. 모든 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어둠입니다. 

왜 사월은 이토록 잔인해야 할까요?* 봄은 왜 이렇게 잔인하게 와야 할까요? 사람들은 왜 이토록 예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 .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 . .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 주시겠지’ 합니다.” (시편 22:1-2, 6-8)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붙잡고 뒹굴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가슴에 묻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의 절규와 절망을 안은 채, 삶의 벼랑 그 끝에 매달렸고, 또 그 매달린 손에 힘이 빠져 죽어 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답없는 질문과 씨름을 하며, 눈물 콧물 뒤범벅 뒤집어 쓴 채 들리는 때론 들리지 않는 비명과 항의와 함께 무너져 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은 어떻게 해 볼 수 조차 없이, 그 주저않을 자리 조차도 없이 가만히 스러져 갔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죽어간, 무너진, 스러진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 ‘어찌하여 저들을, 내 사랑하는 이들을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같은 절규와 절망과 비명과 항의로 그분 앞에 서 있습니다. 무너져 내려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에 얼마의 사람들이 그 누구로 부터든 어디로 부터든 무슨 대답을 들었을까요?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든 그 대답을 찾았을까요? 그 기대한 바는 되지는 못해도 어찌어찌 그 대답의 조각이나 흔적이나 힌트라도 구했을까요? 정말 당신께로부터 어떤 모양으로든 대답을 얻었을까요? 당신께서 주셨을까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1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7)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그렇다.” (14:61-62)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당신이 그 유대인의 왕이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 (15:2) 

그리고는, 

주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같이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후 – 우”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숨을 그 모든 숨의 시작이시며 또한 끝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리십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고개 돌리지 않으시고, 당신께서는 사력을 다해 그 마지막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십니다. 그 마지막 숨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십니다. 당신 안의 그 모든 것들을 주인이신 아버지께 다 돌려드리고,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완전히 당신을 비우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님께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도저히 우리로선 그 끝을 모를 침묵 속으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침잠(沈潛)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께서만 그 위를 조용히 덮고 걷고 하십니다.** 


The Crucifixion, Matthias Grünewald, 1512, Musée d'Unterlinden, Colmar, France


여기 그 <마지막 말씀>을 붙잡은 구상(具常) 시인입니다. 



그날 하루의 끼니를 때우는 것도 

몸을 눕힐 자리도 마음에 두지 않고

무애행(無碍行)으로 한평생을 산 공초(空超)***가 

운명하던 날 시중을 들던 나에게


“자유가 나의 일생을 구속하였구나”

라는 말씀을 남겼다. 


보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일깨운 

나자렛 예수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바로 그분의 뜻을 이루고 가면서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는다. 


저들의 저 비명과 비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懷疑)에서일까?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에서일까?

아니야, 결코 그게 아니야!


가령 저들의 저런 표백(表白)이 없다면

저들은 그저 자기 환상에 이끌려서

저들은 그저 자기 집착에 매달려서

그런 삶을 산 꼴이 되고 마느니

그래서 저들의 저 말씀은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살아온

자기 삶의 마지막 재확인이요,

자기 삶의 마지막 완성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여기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 




너무 잔인한 사월, 하지만 우리 다시 겨울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잔인해도 봄은 와야 하고, 나는 봄으로 있어야 하고, 우리는 함께 봄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잔인해도 겨울은 가야 하고, 봄은 와야 합니다. 


버리다, 놓다, 끝나다. 

그리고 어둠. 

왜 사월은 이토록 잔인해야만 하는지 . . .  



*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기 1:1-2)

***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선생의 호. 구상(具常) 시인의 시 <마지막 말씀> 주(註). 

****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 (마태복음서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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