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부활의 아침,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41)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에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마가복음서 16:1-8)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 줄 사람이 있을까?”
미치도록 그립고 죽도록 보고 싶어 더 이상은 숨고 참고 그럴 수 없어, 남들 눈 피하지 않고 그 사랑하는 이가 잠든 무덤을 찾은 여인들. 그 무덤에 다다르기도 전에 너무 울고 울어 남은 눈물이 있을까 앙 다문 입술과 부릅 뜬 눈으로 걷는 듯 뛰고, 뛰는 듯 우는 여인들. 가다 쓰러질까 서로를 의지하며 다다른 무덤. 꽃으로라도 덮어 그 길 꽃길로 꾸밀까, 향료라도 뿌려 그 길 향기롭게 할까 싶어, 떨린 손에 들린 것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너무 초라해 숨길까 싶어 뒤로 한 채 다다른 무덤가.
걱정은, 어떻게 그 무거운 돌 치우고, 틈을 내 그 안으로 들어갈까 . . . 그런데. 이미 열려 무덤의 어둠이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 삼켜 거기 그 안에 가둘 듯. 이미 작정은 하고 왔으나 예상과는 달리 저리 활짝 열려 있어 막상 들어가려니, 혹시 . . .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무덤 안으로 더 큰 사랑을 내고 용기를 내어 들어갑니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너희가 찾는 그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 사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겁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 자가 죽고, 그 죽은 자가 거기 있어 무덤인데, 그 죽은 자가 있어야 할 무덤에 그 죽은 자가 갑자기 사라지고 없다면, 그래서 차 있어야 할 무덤이 비어 있는 무덤이면, 그 빈 무덤은 산 자에게 기쁨이 아니라 외려 두려움을 줍니다. 산 자인 내가 대신 죽어 죽은 자의 거기를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래서 그렇게 느닷없이 비워진 무덤은 공포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죽은 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산 자에게는 산 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각각에게 맞는 엄연한 자리가 있습니다. 또한 그 있을 때와 그 있지 말아야 할 때가 있어, 그 각각에게 어울리는 엄연한 때가 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자리에 눕지 않고, 죽은 자는 산 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고, 산 자가 죽은 자의 때에 있지 않고, 죽은 자는 산 자의 때로 넘어오지 않고. 그렇게 서로의 자리와 때를 넘보지 않는 것이 엄연한 룰이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그래야 세상에 질서는 잡히고, 그렇게 그 엄연한 구별이 있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야 죽은 자들의 세상이 아닌 산 자들의 세상에서 우리 산 자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순간, 그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불안함이고, 그 너머 무서움으로 점점 커져 갈 것이고,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몹시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 혹시 우리의 삶의 자리에 그 죽은 자들이 하나 둘 들어와 제 자리를 깔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우리의 목을 조여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대신 그 죽음의 자리에 영원히 누워 있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가 우리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의 꽃무덤이어도 말없이 느닷없이 그것이 사라진 자리, 그래서 비어 있는 무덤을 내 눈으로 마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은 사람들로 가득한 무덤밭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무섭고 두렵습니다. 공포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 아닐까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내가 알던,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닐까 봐, 알기는 커녕 나를 몰라보고, 사랑은 커녕 나를 책망하고, 나를 거절하고, 나를 부인하고, 나를 외면하고, 나아가 나를 증오하고, 그래서 나를 몰아 저기 벼랑 저 끝 너머 그 밑으로 떨어뜨려 아예 그 비어 있는 무덤에 나를 가둘까 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 있는 유령일까 봐, 나를 잡으러 온 유령일까 봐, 그것이 두렵고, 그래서 공포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 거기서 너희가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잘못 알았습니다. 여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산 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 했습니다.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이나 누워 있고 갇혀 있는 곳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향료나 발라 드리고 꽃이나 뿌리려 했습니다. 실컷 곡(哭)이나 하고 눈물이나 쏟으려 왔었는데.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이 그저 해 본 말씀이겠거니 했었는데.
‘희롱과 조롱과 멸시와 채찍과 고통 속에 죽으러 지금 나 간다, 너희도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때 하신 말씀이 그저 해 본 말씀이겠거니 했었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모두 기겁을 했었는데.
그럼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 하셨던 그 말씀도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고, 정말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고. 거기서 보자고. 벌써 거기에 가셨다고. 늘상 그러셨 듯 거기서 나를 기다리신다고. 새벽부터 일하느라 춥겠다 불도 피워 놓으시고, 배고프겠다 밥도 지어 놓으시고, 반찬도 필요하다 생선도 구워 놓으시고, 먼저 가 계서 나를 기다리신다고.**
“그들은 뛰쳐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무섭습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이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이 두 손을 대어보기 전에는, 이 가슴으로 그 분을 안아보기 전에는 여전히 무섭고 두렵습니다. 벌벌 떨리는 몸과 마음에 완전히 넋을 잃은 여인들은 조금 전만 해도 산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무덤 그 안의 죽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산 자가 죽은 자의 때를 살려고 어슬렁거립니다. 머뭇거립니다.
그렇습니다. 빈 무덤은 무섭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기쁘게 놀랍고 그래서 놀랍게 즐거울 수 있습니다. 나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사라진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빈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거기서 나를 위해 밥 지어놓으시고 나를 반갑게 맞으실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거기로 뛰어가는 믿음,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보고 듣고 만지고 또 함께 먹고 웃고 떠들고 놀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돌을 굴려내 줄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가로막는 이 돌들을 굴려내 줄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럼, 오늘, 여기,
“나의 믿음을 가로막고 서 있는 이 돌들은 누가 굴려내 줄까?”
오늘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굴려내 버려라. 서로를 가로막은 그 돌들도 굴려내 버려라. 언제까지 그 빈 무덤만 보고 있을 것이냐? 언제까지 무서워 벌벌 떨고만 있을 것이냐?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만나자. 처음 시작한 거기, 처음 사랑이 시작되고 자라고 익었던 거기로 가라. 예루살렘의 자리, 영광의 자리 어쩌구 하지 말아라. 거기도 아니고, 무덤가도 아니니, 다시 그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거기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다시 만나 거기서 다시 새 날을 시작하자. 우리 함께 새 날을 살자.”
그 빈 무덤 그만 두고, 빈 무덤 나로 채우려 말고, 아예 못들어가게 그 빈 무덤 돌로 막아버리고, 우리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에게 부활은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누가복음서 24:37)
** 요한복음서 21:1-14
*** 오늘로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를 마칩니다. 그리고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잃은 양을 찾아 길 떠난 예수’>,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 <노는(遊)신부의 틈 소요기(逍遙記)>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은 늦은 가을과 빠른 겨울이 되면 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