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Apr 16. 2022

깨어나소서 주여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성주간 토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40)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왔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은 지 오래되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시신을 요셉에게 내어주었다. 요셉은 삼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다가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깍아서 만든 무덤에 그를 모시고, 무덤 어귀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마가복음서 15:42-47)


The Deposion, Caravaggio, pre-1602-1604, Rome, Pinacoteca Vaticana


거기, 쏟아내는 태양과 뿜어내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한여름의 어느 산 중턱에 자리잡은 희랍의 야외 공연장. 갑작스런 소나기에 절정으로 차 오르던 한 편의 미친 연극이 맥락 없이 서둘러 막을 내리고, 너무 허무하고 허탈한지 한참을 서성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몇몇, 그러나 더 이상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 거기 배우를 어찌 할 수 없어 포기를 한 것인지, 이젠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그리고 여기, 그 증오와 광기의 흙먼지로 가득했던 해골을 닮은 언덕 위. 무섭도록 무겁게 고요합니다. 저기 보이는 성, 저 안에서 출발해 여기로 이어진 그 광기의 긴 행렬을 따라 이곳까지 그 결말을 보기 위해 따라왔던 그 많던 사람들도 이제 더는 두고 볼 일 없다, 다시 여길 찾을 일 없다, 한여름밤의 악몽에서 깨어난 듯 제 길로 제 집으로 모두 떠났습니다. 




거기,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광기로 시작된 한 편의 광란극이 끝난 극장 안, 빈 객석 한편에는 저들이 해소 다 못하고 두고 간 분노와 증오가, 다른 한편에는 저들 뒤에 숨어 따라왔던 좌절과 절망, 그리고 아픔과 슬픔이 섞여 어지럽게 널려 있고, 빈 무대에는 고도(Godot)를 기다리던 두 사람도 이젠 지친 듯 죽은 듯 힘 없이 무너져 있고, 거기 두 사람 사이에 정말 죽은 나무 한 그루만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을씨년스럽게 적막한 언덕 그 위. 잠깐의 그 억지 주인은 온데간데 없어 그 죽은 나무 하나, 그 세로의 것은 덩그러니 거기 땅에 박혀 있고, 거기 그 아래에 가로의 것은 다른 주인을 기다리는지 땅 위에 지쳐 누워 있습니다. 벌써 들개가 되어버린 도망나온 강아지는 거기 그 주변을 이리저리 그 남은 흔적을 찾아 킁킁거리고, 까마귀 몇 마리 어디 흘린 것 혹시 없나 찾아 그 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거기, 그만 인적도 없는 철 지난 바닷가. 이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빛바랜 파라솔만 몇 개 서고 눕고, 거기 폐장했단 소식을 듣고 어느새 달려온 금속 탐지기 들쳐 맨 사람들 몇. 한여름의 열기 채 식기도 전인데 그 둥그렇고 납작한, 차가운 금속의 주둥이들은 연신 모래밭 그 위를 수줍은 키스라도 하는 듯 휘휘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죽은 나무토막에서 도망친 못들을 찾는 것은 아닐 테고, 광기 속에 흘린 동전들, 흘러내린 목걸이와 반지를 찾는다고 그 모래밭을 샅샅이 탐지하여 촘촘히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그 광기와 열기는 한여름 소나기를 맞은 듯, 무섭도록 식어 무섭도록 차갑고 무섭도록 적막한 극장 안, 무섭도록 아무렇지 않은 듯 매몰차게 떠난 객석, 그리고 무섭도록 익숙한 듯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야속하게 비워진 무대입니다.  


애꿏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제자 베드로는 ‘나는 나사렛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을 것이고, ‘그렇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다’ 몇 번이고 말씀하셨어도 저들은 그 말씀 끝나기 무섭게 들고 있던 그 못을 쳤을 것이고, ‘그래도 소용 없다, 밤새 지켜봐야 소용 없다’ 말씀하셨어도 저들은 이제 그 무덤 큰 돌로도 막고 장정 몇으로도 막고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말씀하셨어도 아니 이걸로 끝이다, 모든 게 다 끝났다, 내린 막은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막 내리자 무섭게 사람들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제 갈 길 서둘러 떠났고, 제 있던 곳 찾아 이미 뿔뿔이 흩여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둠 속에 숨어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같이 여기를 도망쳐 다른 어디로 가야 할까? 나도 그 흘린 것들을 찾아 뭐라도 주워 담을까?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어야 하는데 . . .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곧 부활의 아침이 올 텐데, 우리 잠깐 그 사이에 있는 것 뿐인데,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끝이 날 드라마가 아닌데, 아직 멀었는데, 정말은 이제부터인데, 저렇게 나가버리면 다시 여기 극장 안으로 들어오기 쉽지 않을 텐데, 조금만 더 진득하게 기다리면 되는데, 그냥 이기지 못하는 척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조금 바보스럽고 미련스럽게 보이더라도 거기 조금 있으면 될 텐데. 


그 내려진 막은 아주 내려온 것이 아닌데, 무겁고 무섭게 내려왔던 그 막은 이제 곧 다시 오를 텐데, 그리고 다시 무대에 그리고 이번엔 객석에도 그 불이 환하게 들어올 텐데. 그러고나면 다시 오른 그 막은 영원히 내려오지 않을 텐데. 나의 졸린 눈꺼풀로 애써 내리지 않는 이상은, 보지 않겠다 나의 눈을 억지로 감지 않는 이상은, 그 막은 두 번 다시는 내려올 일이 없을 텐데.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여기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진한 젖내 풍기며 곤한 잠에 빠진 아기, 언제까지 그 잠에 있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 아기 혼자 두면 안될 텐데. 이제 곧 깨어 엄마 없는 걸 알면, 저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간 걸 알면, 그러면 울고불고 할 텐데. 그 소리 듣고 뛰어 오려면, 그럼 늦을 텐데. 많이 늦을 텐데. 그러지 말고 그 옆에서 좀더 있으면 좋을 텐데. 안고 있기 힘들면, 잠을 못자 피곤하면, 아기 곱게 이불에 뉘이고 잠깐 그 옆에서 조금 꾸벅해도 좋을 텐데. 그렇다고 아예 잠들진 말고, 아예 등 돌려 눕진 말고, 사랑스런 그 아기 곁에 깨어 있는 듯 조금 잠짓하면 좋을 텐데. 아기 저 혼자 두면, 그렇게 가버리면 안되는데.  


그땐 힘찬 울음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오셨지만, 이번엔 사랑스럽고 따뜻한 미소 지으시며 그 어머니를 그리고 우리를 찾아 다시 오실 텐데. 거기 십자가 위, 이젠 두 번 다시 여기엔 안 오실 듯, 여기에 있는 정 없는 정 다 떼시고 저기로 영영 떠나시는 듯 그렇게 황망히 가셨지만, 그러나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너희가 무얼 잘못 알았다 하시는 듯, 여기 무덤 밖 몸져 드러누운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텐데. 지체하지 않으시고, 어머니 맘 우리 맘 너무 조이지 않게 금방 오실 텐데.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그분이 나를 버렸습니다. 그땐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널 잊으셨다고, 널 아예 버리셨다고. 그래서 나는 그분을 놓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땐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래서, 어둠이었습니다. 작은 어둠도 있었고, 큰 어둠도 있었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어둠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어둠이 나에게는 없는 줄,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한 번, 아니 몇 번 왔다 갔으니 다신 어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게들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금방 어둠이 다시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쉽게 어둠이 또 찾아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자주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신앙을 한다고, 그래서 신앙을 하고, 그리고 신앙을 살고, 그러다 어느새 신앙을 않고, 잃고, 놓고.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나에게 신앙이 없고, 허둥지둥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신앙을 찾고, 그래서 다시 그 신앙을 하고, 그리고 그 신앙을 살고, 그러다 또 다시 그것을 않고, 잃고, 놓고, 그리고 그것이 없고. 그런 나를 보고, 그래서 또 다시 찾고 . . . 이런 영 형편 없는 나.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그래서 이 형편 없는 나, 

너무 꾸짖지는 마시고 조용히 흔들어 깨워주소서. 




흔들리며 가는 것이 그냥 초보 자전거 운전자의 길만이 아니고, 나의 신앙도, 나의 신앙을 하는 삶도 그러지 않던가요? 그 아픈 금요일과 그 기쁜 부활의 주일 사이, 그 사이가 때론 너무 길고 때론 너무 넓고 때론 너무 멀고 또 그 사이가 자주 있고 또 많지 않던가요? 


우리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금요일과 승리와 환희의 부활 주일, 그 사이를 삽니다. 참 좋으신 그분이 내게 주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품고, 참 좋으신 그분과 함께 하는 예쁜 기억을 차곡차곡 담아 그 사이를 살아갑니다. 어둔 금요일의 어제를 넘어 밝은 부활 주일인 내일을 소망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이를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 여기 그 사이를 지킵니다. 막이 다시 올라가기를, 불이 다시 켜지기를, 예수님께서 그 무대 한가운데 다시 서시는 그 모습 보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나도 그 위 함께 서 있는 무대를 상상하며, 여기 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Pieta, William Adolphe Bouguereau, 1876


여기 비탄에 잠겨 아들의 그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죽은 아들을 가슴으로 끌어내려 그 고통을 받아 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잠든 무덤가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혹시 누가 다시 뺏지 않을까, 언제까지고 지킬 작정으로 있습니다.   


그 어머니 마리아 곁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짙은 어둠 더욱 짙게 주님을 함께 기다립니다. 

그러니, 

깨어나소서 주여. 



* 사뮈엘 베케트 (Samuel Beckett)트의 부조리극 <Waiting for Godot, 고도를 기다리며> 

** <Stabat Mater dolorosa 비탄에 잠긴 성모께서 서 계시다> 

Antonio Vivaldi’s Stabat Mater dolorosa 

https://www.youtube.com/watch?v=qBLQMnG3pZs

Giovanni Battista Draghi’s Stabat Mater dolorosa 

https://www.youtube.com/watch?v=FjJ02agjjdo

Gioachino Rossini’s Stabat Mater dolorosa

https://www.youtube.com/watch?v=khYXgba2_2w

세 번째의 Rossini의 Stabat Mater dolorosa는 아름다운 극장,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텅 빈 객석, 거기에 검은 마스크를 쓴 채 지휘하는 정명훈과 연주자들이 가슴을 참 먹먹하게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